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인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박사가 ‘2026년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앙인으로 남을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이 최근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게재했다.
로빈 슈마허 박사는 소프트웨어 경영자, 기독교 변호사로서 활동하며 다수의 기독교 서적을 저술했으며, 최근 저서로는 ‘확신에 찬 믿음: 사도 바울의 변증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가 있다. 다음은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최근 ‘왜 어떤 미국인들은 종교를 떠나고, 다른 이들은 남아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는 미국 성인의 대다수인 86%가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퓨리서치 자료는 “어린 시절의 종교 경험이 대체로 긍정적이었는지, 아니면 부정적이었는지가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의 종교를 유지하는지 여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사에 따르면 종교 안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종교 경험이 대체로 긍정적이었던 미국인의 84%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종교를 자신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다. “종교 안에서 성장했고 긍정적인 종교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 가운데 현재 무종교인(none)으로 남아 있는 비율은 10%에 불과했으며, 6%는 자신이 자랐던 종교와 다른 종교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 안에서 성장했지만 종교 경험이 부정적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69%는 현재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종교를 유지한 비율은 24%에 그쳤고, 7%는 다른 종교를 선택했다.”
이러한 결과는 오랫동안 종교 회의론자들이 주장해 온 논리를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 회의론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주된 이유가 성장 배경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가 영적으로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인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일 뿐이며, 만약 같은 사람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자랐다면 국민의 85~90%가 수니파 무슬림인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이슬람 신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에는 종교인은 종교 문제에 있어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며,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한 자유사상가인 비신앙인들과는 다르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그러나 퓨리서치는 이 주장에도 제동을 건다. 조사에 따르면 “종교 없이 성장했지만 현재 종교를 갖게 된 미국 성인은 3%에 불과했고”, “무종교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약 73%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종교적으로 무소속 상태로 남아 있었다.”
결국 회의론자들 역시 자신들이 어린 시절 형성된 ‘무신앙’이라는 신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헬라 시대와 고전 그리스에는 성장 배경과 관습, 전통 때문에 갖게 된 믿음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노미조(nomizo)’다. 주목할 점은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 어디에서도 이 단어가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 성경 전반에서 사용되는 신앙의 단어는 ‘피스티스(pistis)’인데, 이는 ‘설득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페이도(peitho)’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단어는 신뢰, 확신, 확고한 믿음, 신빙성, 믿을 만한 대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류의 신앙과 성경이 가르치는 몇 가지 진리는, 지금 기독교인인 사람이 2026년에도,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그 이후의 모든 해에도 계속 기독교인으로 남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한때 기독교인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간증은 무수히 많다. 신앙을 떠난 이유와 사연도 다양하지만,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주요 이유는 “종교의 가르침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46%), “삶에서 중요하지 않게 됐다”(38%), “서서히 멀어졌다”(38%)였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난 신자에게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로 인해 존 맥아더는 “전(前)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때 믿었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수많은 주장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만 있는 피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러한 믿음은 결국 기독교를 떠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둘째, 성경은 신앙을 지키는 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반복해서 가르친다. 찰스 스펄전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것이 당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당신을 붙잡고 계신 것이 당신을 구원한다.”
그 예는 유다서 첫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유 1:1)
여기서 ‘지키다’로 번역된 헬라어 ‘테레오(tēreō)’는 보호하고, 감시하며, 붙들고, 보존하고, 지속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과거에 시작되었으나 그 효력이 현재까지 계속됨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칠천 명을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었다”(왕상 19:18)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선택에 따라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팀 켈러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피조물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한 번 적용된 이후, 스스로 그 은혜에서 자신을 분리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요 3장)이 2026년이나 그 이후의 어느 해에도 신앙을 떠나지 않을 이유다. 마르틴 루터는 ‘의지의 속박’에서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 구원을 내 의지의 통제에서 빼앗아 자신의 손에 두셨고, 나의 행위나 노력에 따라가 아니라 자신의 은혜와 자비에 따라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분은 신실하시며 거짓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그리고 어떤 마귀나 대적도 나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위로의 확신을 나는 갖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2026년은 우리 모두에게 기쁜 한 해가 될 충분한 이유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