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교회 안에 자주 나타나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시리즈입니다. 매주 한 가지 오해를 살펴보며 성경과 신학과 목회적 관점에서 성찰하여 장애를 가진 성도들이 비장애 성도들과 함께 건강한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지난 글에서는 “장애는 죄에 대한 징벌이다,” “장애인은 연민의 대상이지 동역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장애인은 일반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 라는 오해를 다루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성도를 향한 교회의 시선 속에는 종종 하나의 강한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만날 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무엇이 치유되면 좋겠습니까?"라는 질문부터 던지며, 주중에 어떤 대화를 나누든 결국 "치유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정리하곤 합니다. 마치 장애인의 가장 깊은 소원은 언제나 장애의 치유라는 전제가 굳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시선 속에서 그들의 다양한 삶과 관계, 부르심과 꿈, 기쁨과 고민은 뒤로 밀리고, 치유에 대한 갈망만이 과장된 형태로 부각됩니다.
목회 현장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한 교회에 오랫동안 휠체어를 타고 출석하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 자녀 교육, 노부모의 건강, 자신의 진로와 신앙 고민 등 다른 성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소그룹 나눔 시간에 그가 직장에서 겪는 갈등이나 자녀의 신앙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고 싶어 해도, 나눔이 끝날 무렵 리더는 늘 “무엇보다도 집사님의 치유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집사님은 그 기도에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합니다. 다른 성도들은 진로와 결혼, 사역, 내적 갈등과 신앙의 고민까지 폭넓게 나누는데, 자신에게 돌아오는 관심은 언제나 치유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경험은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교인들은 진심으로 그 가정을 돕고 싶어 하며 "아이를 위해 치유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작 부모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보람과 기쁨, 학교생활과 친구 관계, 가족이 함께 지나온 감사의 순간들입니다. 부모는 과거에 치유를 간절히 구했지만, 지금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혜와 공동체의 지지, 자녀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더 깊이 고민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가정을 늘 "치유를 위한 중보기도 제목"으로만 기억합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장애인과 그 가족은 삶 전체로 사랑받는다는 느낌보다, 언제나 치유의 대상으로만 호명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쉽습니다.
성경은 치유의 하나님과 치유를 위한 기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나아와 치유를 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질병과 고통을 실제로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치유에만 머물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마가복음 10장의 바디매오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에게 “네게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막 10:51).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직접 묻고 들으셨습니다. 이는 한 사람의 선택과 갈망을 존중하시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데려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눅 5:20). 이는 몸의 회복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더 깊은 차원을 먼저 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선언하시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눈먼 자가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치유는 그 사명 가운데 중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몸과 영혼, 관계와 공동체를 아우르는 더 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성도들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육체적 치유를 간절히 구합니다. 통증과 피로, 기능의 제한이 일상을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치유에 대한 기도는 정당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실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장애를 가진 모든 성도에게 치유에 대한 갈망을 전제하고 그것만을 강조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이에게 치유는 가장 간절한 기도 제목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삶의 여러 기도 제목 중 하나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다른 영역에서 은혜를 구하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의 공통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우선순위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가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로 선포하십니다(사 43:7). 또한 바울은 먹고 마시는 일과 같은 일상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0:31).
이 목적은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며, 어떠한 상황과 조건을 초월합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과 고통, 기쁨과 슬픔의 자리에서도 우리의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인 성도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도록 돕는 기도입니다. 그 삶을 위해 치유와 건강을 구하는 기도도 필요할 수 있고, 말씀 묵상과 기도 생활, 공동체의 교제와 돌봄, 현실적 지원을 위한 기도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오해를 어떻게 교정 할 수 있을까요?
첫째, 교회는 장애인들의 기도 제목을 직접 듣는 태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듯이, 교회도 그 질문을 실제로 던져야 합니다. 어떤 이는 “통증이 줄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좋은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고 표현하며, 어떤 이는 “가족이 지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모든 기도 제목을 동일한 무게로 존중해야 합니다.
두번째, 깊은 대화의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 제목을 알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장애를 가진 성도에게 다가가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안전하게 다가올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소통하고 교제하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대화의 깊이는 달라집니다.
소그룹 나눔 시간에 장애를 가진 성도에게도 다른 성도들과 동일하게 삶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십시오. 그들의 직장 이야기, 가족 이야기, 신앙 고민, 기쁜 일과 어려운 일을 들어주십시오. 그들이 나눈 이야기에 기반한 구체적인 기도를 드려 주십시오. 장애를 가진 성도를 단지 기도 제목 이상의 존재로 바라볼 때, 진정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샬롬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회복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 단절은 마음과 생각, 관계와 공동체, 삶의 방향과 예배의 중심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성령의 은혜 안에서 새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참된 회복은 단지 어떤 기능 혹 건강의 회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 사함과 화해의 은혜 위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신뢰하며 살아가도록 마음과 예배가 새로워지고, 관계와 공동체가 다시 세워지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빚어지는 것이 회복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전인적 시각을 회복할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사회에서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는 이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여 그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세우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치유를 구하는 기도와 더불어 관계와 소명, 일상과 기쁨을 위한 기도를 함께 드릴 때, 장애인들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과 교회 앞에 열려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회복을 구하며, 그리스도의 구속 공동체로 성숙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