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매년 12월이 되면 세상은 성탄의 불빛으로 물든다. 그러나 신앙인들조차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정말 예수님은 12월 25일에 태어나셨을까?”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단순한 연대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신앙의 본질과 성육신의 의미를 가늠하게 한다.
성경이 전하는 단서: 예수의 실제 탄생 시기
성경은 예수님의 정확한 출생 날짜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가 있다.
누가복음 2장 8절은 “목자들이 밤에 들판에서 양을 지켰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팔레스타인의 12월은 매우 춥고, 양들은 보통 우리 안에 가둔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은 겨울이 아니라 봄이나 가을일 가능성이 크다. 일부 학자들은 유월절 전후(3~4월), 혹은 초막절(9~10월) 무렵으로 본다.
또한 누가복음 1장의 사가랴 기록은 다른 추정 근거를 준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제8반열)에 속했는데, 이는 역대상 24장에 따르면 6월경 성전에서 봉사하던 순번이다. 그가 봉사를 마친 뒤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6개월 뒤 마리아가 잉태했다면, 예수의 탄생은 그로부터 약 9개월 후, 다음 해 9월경, 즉 초막절 시기로 계산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구절은 ‘장막을 치다’(스케노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의 탄생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사건’, 즉 초막절의 완성으로 보는 해석은 신학적으로도 아름답다.
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한 이유
그렇다면 왜 교회는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했을까? 이는 역사적, 상징적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로마 제국에는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적의 태양)’ 축제가 있었다. 12월 25일은 동지(冬至) 직후로,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로마인들은 이 날을 ‘빛이 어둠을 이기는 날’로 기념했다. 4세기경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이 날을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바꾸어 기념했다. 이교 축제를 대체하여 복음적 의미를 새긴 것이다.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태양의 탄생을 버리고,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라.”
둘째, 초기 교회는 ‘수태일(Annunciation)’과 ‘부활절(Easter)’의 계산법을 연결했다. 예수의 수태일을 3월 25일(춘분점 이후)로 계산하고, 그로부터 정확히 9개월 후인 12월 25일을 탄생일로 정했다. 이는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신학적 상징이었다. 봄에 ‘생명의 씨’가 뿌려지고, 가장 어두운 겨울에 ‘구원의 빛’이 태어났다는 교리적 선언이었다.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견해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신학자들이 이 날짜에 의미를 부여했다. 히폴리투스(3세기 초)는 「다니엘서 주석」에서 이미 “그리스도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고 기록했다. 이는 3세기 초 로마 교회에서 이미 성탄일 전통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요한 크리소스톰(4세기)은 “12월 25일은 로마 교회로부터 전해진 전통”이라며, 단순히 태양신 축제의 대체가 아닌 교회의 오래된 신앙적 유산임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날짜를 천문학적으로 상징화하며 말했다. “그리스도는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에 태어나셨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커지는 것을 상징한다.” 즉, 자연의 리듬을 복음의 상징으로 전환한 것이다. 겨울의 한복판, 세상은 어둡지만, 그 어둠 속에서 빛이 시작된다는 고백이다.
근대 이후 학자들은 천문학적 근거를 통해 예수의 출생 연대를 추정하려 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별” 현상을 근거로, 기원전 7년경 목성과 토성의 삼중합(planetary conjunction)을 언급한다. 이 현상은 고대 천문학자들에게 ‘왕의 별’로 여겨졌으며, 예수의 탄생을 암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헤롯 대왕의 사망이 기원전 4년이므로, 예수의 실제 출생 시기는 기원전 6~4년 사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2월 25일은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 빛과 어둠의 전환점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이렇게 말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주적 차원의 반전이다. 죄와 절망, 죽음의 긴 겨울 속에 하나님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 사건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는 빛이 되시기 위해 어둠의 계절에 오셨다”고 설교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탄은 단지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날’이다. 이날, 하늘과 땅이 만났고, 시간과 영원이 포옹했다. 인간의 절망 한가운데서 구원이 시작된 날, 그것이 바로 성탄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에 침투하신 ‘구속의 침입’이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언제로 보든, 중요한 것은 그분의 탄생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은 겸손의 상징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열린 구원의 문이다. 그분은 권력의 중심이 아닌,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오셨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의 집에 들어오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집이 그분의 거처가 되어야 한다.” 성탄은 과거의 축제가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다시 맞이하는 결단의 날이다. 12월 25일 하루만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이 ‘그리스도의 다시 태어남’이 되어야 한다. 어둠의 한가운데서 빛이 태어났다. 그래서 성탄은 희망의 시작이다.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날이 바로 진정한 성탄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