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교회 안에 자주 나타나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시리즈입니다. 매주 한 가지 오해를 살펴보며 성경과 신학과 목회적 관점에서 성찰하여 장애를 가진 성도들이 비장애 성도들과 함께 건강한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지난 글에서는 “장애는 죄에 대한 징벌이다”라는 오해를 다루었습니다
오해 2: 장애인은 연민의 대상이지 동역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기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교회의 삶 속에서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은 성경적 관점보다 사회적 통념과 문화적 습관에 의해 형성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오해가 장애인을 주로 연민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연민은 선한 마음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연민이 관계의 기본 구조를 이루게 되면 장애인은 함께 신앙을 나누는 동역자가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만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때 장애인은 교회와 함께 고민하고, 사역의 방향을 함께 점검하며, 공동체를 함께 세워 나가는 동역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선행을 통해 보호받는 존재로만 머무를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장애를 가진 이들의 영적 성장뿐 아니라, 교회가 무엇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한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장애 아동과 장애 성인을 위한 특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분명 귀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실제 운영 방식은 그들을 주일예배, 공동 기도 모임, 신앙 교육, 리더십 훈련과 같은 교회의 신앙 형성의 중심 흐름과 분리된 공간에 머물게 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친절했고, 여러 도움과 프로그램이 제공되었지만, 장애인 성도들은 교회의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앙 고백은 회의록에 기록되지 않았고, 그들의 질문과 통찰은 교회의 신학과 사역을 형성하는 과정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 사역은 “누군가를 돕는 부서”로 머물고, 장애인 성도는 교회 구조와 의사결정의 주변부에 놓이게 됩니다. 이 경우 문제는 개인의 태도 이상으로, 장애인을 바라보는 교회의 기본 구조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동역자”가 아니라 “돌봄의 대상”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연민이 중심이 될 때 관계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기울어집니다. 돕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고정된 위치를 갖게 되고, 그 경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집니다. 돕는 사람은 자신의 역할에 익숙해지고, 도움을 받는 사람은 감사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의 목소리와 선택, 신학적 통찰과 삶의 해석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합니다. 장애인은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지만, 동시에 자신이 교회의 중요한 논의와 책임에서 비켜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연민이 깊어질수록, 의도와 달리 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영적 주체성이 약해지는 모순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구조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와 사회적 약자를 향한 깊은 긍휼을 가지셨지만, 그 긍휼은 늘 관계와 친교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멀리서 바라보며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곁에 앉아 말씀을 나누고, 함께 식사하며,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들을 공동체 이야기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이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상대를 낮은 위치에 고정시키는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동등한 인격으로 마주 보게 하는 관계의 통로가 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세속적 연민은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남기지만, 예수님의 연민은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하나의 몸으로 묶는 친교를 형성합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장애인을 자비의 수혜자로만 여기는 태도는 결국 교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함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교회를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된 한 몸으로 묘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약한 사람도 보호해야 한다는 수준의 말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는 연약해 보이는 지체가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장애인은 교회의 사역을 위해 조금 보탬이 될 수 있는 부속적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없을 때 교회가 무엇인가를 상실하게 되는 필수 지체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또한 동역의 깊은 신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멀리서 바라보며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입니다. 연약한 몸을 입으시고, 피곤함과 아픔과 외로움의 경험을 친히 지나가셨습니다. 성육신은 연민의 거리에서 동역의 자리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움직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과 같은 자리에 서셨다는 사실은, 교회가 서로를 향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교회는 누군가를 위에서 돕는 집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라 서로를 동등한 형제로, 자매로, 동역자로 인정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비전 안에서 장애인은 교회의 사역이 향해야 할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회 사역을 함께 만들어 가는 주체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각 성도에게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를 주십니다. 장애를 가진 성도 가운데에는 깊이 있는 중보기도의 은사를 가진 이도 있고, 관계와 위로의 은사를 통해 상처 입은 이들을 붙드는 이도 있으며, 고난을 통과하며 얻은 지혜로 공동체의 신학적 분별을 돕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장애인을 돕는 대상으로만 이해할 때, 교회는 단지 사랑을 베풀 기회를 잃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은사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일을 넘어서, 실제 구조와 기대치를 점검해야 합니다. 장애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는 사역만 계획하고 있지 않은지, 장애인 성도가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두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의와 나눔의 자리에 장애인 성도의 자리가 실제로 마련되어 있는지, 장애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교회의 방향에 의견을 나눌 기회가 있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이는 장애인을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연민은 감정의 차원에 머물 수 있지만, 동역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공동체의 구조입니다. 연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서도록 만드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역은 서로를 같은 자리에서 세워 주며 상호성을 회복합니다. 연민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동역은 서로 책임을 나누며 함께 짐을 지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연민은 순간적 감동을 줄 수 있지만, 동역은 교회의 문화를 바꾸고 구조를 새롭게 하는 힘을 가집니다.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 함께 동역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 주는 증언이 됩니다. 장애인이 자비의 수혜자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의 증인과 대화자이자 사역의 동반자로 서게 될 때, 교회는 더욱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한국 교회 곳곳에서 세워져,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교회로 자라가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