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 케네디. ©Christian Post
아치 케네디.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아치 케네디의 기고글인 '문화가 성경적 진리를 증오 발언이라 부를 때'(When culture calls biblical truth hate speech)를 21일 게재했다.  

아치 케네디는 신앙과 문화의 교차점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 평론가이자 블로거, 연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최근에 우리가 찰리 커크에게서 본 특별한 점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성경적 진리에 굳건히 섰지만 동시에 자비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커크는 담대하게 토론했으나 결코 악의를 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으면서도 반대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이야말로 필자가 그의 사역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이었다. 

오늘날 문화가 성경의 진리를 "증오 발언"이라고 낙인찍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자비와 함께한 진리의 유산 

찰리 커크는 토론을 다른 이를 모욕하는 기회로 삼지 않았다. 그는 토론을 하나님의 진리를 제시하는 기회로 보았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잘 요약했듯이, 커크는 성경에 대해 조금도 사과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자비를 드러내며 서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드물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불신자들은 그를 가혹하거나 증오에 찬 사람으로 보이게끔 짧게 편집된 밈이나 반쪽짜리 인용구를 퍼뜨리곤 했다. 그러나 전체 대화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커크의 목적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인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그의 말을 왜곡하고 잘라내어 전달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서의 신실함이다. 

성경적 진리가 증오로 낙인찍힐 때 

우리는 이제 성경의 일부가 "증오 발언"으로 분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혼, 성별, 태아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를 인정하면 검열, 조롱, 심지어 처벌까지 받을 위험이 있다. 

이사야는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라고 경고했다.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기준을 뒤집어 놓았고, 빛을 어둠이라 부르고 어둠을 빛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고린도전서 13:6). 진정한 사랑은 진리를 말한다. 그것이 인기가 없더라도 말이다. 

흔들리는 문화적 도덕 vs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문화적 도덕은 끊임없이 변한다. 오늘 칭송받던 것이 내일은 비난받는다. 감정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살인, 성적 윤리, "연민"이라는 이름의 불법 정당화 등 수없이 바뀌는 잣대는 혼란만 낳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정치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35)고 하셨다. 그렇기에 커크가 성경에 모든 것을 기초했던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문맥 왜곡: 공격의 전략 

커크의 비평가들은 그의 발언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왜곡하곤 했다. 그가 민권법(Civil Rights Act)에 대해 한 언급은 차별로 몰렸으나 실제로는 연방 정부의 과도한 개입에 대한 지적이었다. 또한 제2차 수정헌법(총기 소유권)에 대해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생명에 무심한 태도로 왜곡되었지만 그는 동시에 희생을 비극으로 규정했다. 

성경조차도 이런 식으로 왜곡되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시편 91편을 인용했지만 문맥에서 벗어나 있었다(마태복음 4:6). 오늘날 진리를 말하는 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공격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 진리가 사랑인가 

예수님은 "조용히 있으라, 사람을 불쾌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1-32)고 하셨다. 

세상은 진리를 증오라 말하지만, 진리의 부재야말로 가장 잔혹한 증오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것" (에베소서 4:15)을 명령한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침묵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이번 주 로이터 보도에서, 커크와 관련된 발언으로 정직 휴직 처분을 받은 법학 교수의 사례는 문화가 얼마나 엄격하게 발언을 검열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경조차 증오로 낙인찍힌다면 우리 역시 같은 적대에 직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뒤집힌 세상 속에서 굳건히 서기 

세상은 우리를 "증오자"라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러운 행동이다. 

찰리 커크는 그것을 담대하게 실천했다. 프랭클린 그레이엄의 옹호는 진정한 기독교가 죄를 눈감아주거나 진리를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와 자비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임을 다시 일깨워준다. 

찰리처럼 우리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경적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