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펙 박사
로렌스 펙 박사

1919년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의식의 고양과 확산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운동은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쿠데타와 함께, 두 나라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족주의 감정을 교묘히 이용해 이상주의적 청년들을 포섭했고, 이는 그 운동들 자체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따르면 '부르주아 운동'에 불과했음에도 그러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와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한국과 중국의 젊은 애국자들을 끌어들였으며, 그들은 외래적인 이념을 민족주의적 염원의 수단으로 오인하고, 비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과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 그리고 이후 정권을 장악한 공산 독재자들은 민족주의를 냉소적으로 악용했으며,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중국공산당(CCP), 북한 노동당, 그리고 대한민국 내 친북 세력의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공산주의 활동과 목표가 진정한 민족주의와 혼동되도록 만든 데에는 좌파 성향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 언론인들, 논평가들의 편향된 작업도 기여했다. 이들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정책과 활동이 본질적으로는 민족주의적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부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는 허구를 퍼뜨렸다. 

보다 넓고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가진 이들은, 이념에 기반한 학계의 교조적 해석을 과감히 비판해야 한다. 

오랫동안 학계와 대중 의식을 지배해 온 허구는, 최근 각국의 문서고가 개방됨에 따라 이루어진 역사 연구를 통해 진지하게 도전받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구는, 중국과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 및 지도자들이 실제로는 진실되고 순수한 민족주의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재조명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소련과 외국 공산주의 요원의 직접적 지원, 현장 지도, 자금으로 시작되었으며, 초기 권력 투쟁 과정에서 이들은 모스크바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자연합)의 명령에 충실히 복무했다. 이는 때로는 자국의 이익을 배신하거나, 심지어 동지들을 희생시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소련의 당 노선을 충실히 따랐으며, 그것이 자국의 이익에 정면으로 배치되거나, 국가적 배신에 해당하더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민을 죽이는 일에까지 가담한 것이다. 

예컨대, 1929년 중동철도 분쟁 당시 소련이 중국을 침공해 수천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을 때, 중국공산당은 이 침공을 지지했다. 

한국의 경우, 1921년 '자유시 참변'에서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명령에 따라 소련군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무장을 들고 소련을 수호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1920년대부터 소련은 자국 극동지역의 중국인과 한국인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해 강제 추방하기 시작했다. 일부 한국인은 일본으로 강제 이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탄압은 1930년대 스탈린 치하에서 이루어졌다. 수많은 충성스러운 공산당원들조차도 '대숙청'의 일환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거나 처형당했다. 

이 숙청은 중국과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포함했으며, 중국공산당과 한국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학살에 적극 동조하고 가담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동지들을 소련의 지시에 따라 잔인하게 숙청했으며, 각자 내부적 숙청으로도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1930년대 초 'A-B단 사건'에서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했으며, 이는 만주의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민생단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또는 자국 지도자들에 의해 일본과 연루되었다는 조작된 혐의로 살해당했다. 

일부 좌파 성향의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이 이 숙청을 중단시키려 했다고 주장하며, 민족 간 갈등으로 몰아가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김일성이 실제로 숙청을 주도했거나 최소한 동조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김일성은 숙청 희생자 명단을 폐기했다는 점에서 일부는 그의 '민족주의적 동기'를 강조하려 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은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가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본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 하의 조선공산주의 지도자 중 숙청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가담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북한의 후대 미화 서술과 달리, 만주에서 김일성이 이끈 부대는 독립적인 '조선공산군'이 아니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일원이었고, 조선공산주의자들도 모두 CCP의 지시와 코민테른의 노선에 복종했다. 

최근 연구는 연안(옌안)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마오쩌둥 역시, 당시 예상보다 훨씬 더 소련과 밀접했으며, 코민테른의 정책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히틀러-스탈린 협정 당시, 마오와 중국공산당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나치 독일을 '영국과 프랑스의 희생자'로 묘사하고, 대독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이라며 반대했다. 

마오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를 '진보 인류의 지도자'로 찬양했으며, 1941년 초 소련-일본 중립조약도 지지했다. 이는 이들이 자국의 이익보다 소련과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이익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1940년 말경 김일성과 그 휘하 부대가 일본군의 압박을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는 전술적 후퇴로 보지만, 이 시기가 소련-일본 중립조약이 체결되기 전이라는 점은 그 의미를 재조명하게 한다. 

중국공산당과 일부 서구 좌파 학자들은 중국에서의 반일투쟁을 CCP가 주도했다고 주장해왔지만, 주류 역사학계는 장제스(장개석)와 국민당이 대일전의 대부분을 담당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좌파 학자들은 일부 국민당 세력이 일본과 협력했다고 비판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마오 휘하의 공산군 또한 일본군과 수년간 사실상 공존 내지 협력한 정황을 드러내고 있다. 

북한과 일부 좌파 학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인사 등용 문제로 공격하며 그를 '친일'로 몰아붙이지만, 실제로 김일성 정권 역시 과거 일본 제국에 협력했던 자들을 자신의 내각에 임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김일성이 1950년 남침으로 벌인 동족상잔의 전쟁은, 그가 진정한 애국자였다는 신화를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결정적 증거였다. 

1960년대 중소 국경 분쟁이나 중-북-소 간의 이념 대립을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최근의 문서 연구는 이 분열이 단순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마오와 김일성이 각각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주도권 장악과 국내 권력 장악을 위해 벌인 이념 경쟁과 권력투쟁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마오의 경우, 탈스탈린 시대에 제3세계 내 리더십 확보와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 장악을 원했고, 김일성과 마오 모두 195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친소(또는 친중) 세력을 숙청하거나 집단지도체제를 부정했다. 

따라서 이들 간의 갈등은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상당 부분 권력욕과 이념적 패권 추구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김일성이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는 신화는 단지 역사적 논쟁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이 신화는 국내 정치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한국 내 극좌 및 친북 성향의 '민족해방계(NL)' 운동은 반일·반미 감정을 기반으로 김일성과 그 후계자들을 '진짜 민족주의자'로, 북한을 '진정한 민족 국가'로 묘사해왔다. 반면 대한민국의 건국과 지도자들은 '외세에 굴종한 괴뢰'로 매도되었다. 

이러한 프레임은 이념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선거 정국과도 맞물린다. 과거 이석기와 통합진보당, 그리고 그 계승 세력인 현재의 진보당은 그 대표적 사례다. 

문재인, 이재명 등의 민주당 지도부는 이러한 NL 및 주사파 계열 인사들을 정책 보좌진, 장관, 비례대표 등으로 등용하고, 최근 총선에서는 진보당과 '연합 전선' 구도를 구축하기까지 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안보와 한미동맹에 심각한 우려를 낳는 행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NKINSIDER(https://www.nkinsider.org/)에 실린 로렌스 펙 박사의 기고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한 것입니다. 

로렌스 펙(Lawrence Peck)은 25년 이상 미국 내 친북 성향 단체 및 극단주의 활동가들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면밀히 추적해왔으며, 이 분야의 대표적인 미국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미국과 한국 양국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해당 주제에 대해 미국과 한국에서 강연과 집필 활동, 언론 인터뷰 등을 활발히 해왔습니다. 학력으로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로욜라 로스쿨(Loyola Law School of Los Angeles)에서 법학박사(Juris Doctor) 학위를 받았습니다. 또한 과거에는 한국에서 지적재산권 라이선싱 및 국제 비즈니스 개발 분야에서 국내 대기업들과 함께 일한 경력이 있습니다. 현재 그는 미국의 북한자유연합(North Korea Freedom Coalition)의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