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교수 (전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부총장)
(Photo : 기독일보) 김재성 교수(전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부총장)

인구 감소와 무신론자들의 폭발적인 증가로 세계 곳곳에서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교회를 흔들어놓은 가짜 복음 있는데, 실상은 성경의 바른 교훈에서 벗어난 신학의 변질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달에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종교개혁 오백주년 기념행사 (2017년)를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유럽 곳곳에서 문닫은 교회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네델란드와 독일을 비롯해서 그 주변 여러 나라에서 무신론 사상이 압도하고 있고, 사회의 세속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장면들을 목격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개혁신학이 사라지자, 교회가 문을 닫다

잉글랜드에서 박해를 피해 도버 해협을 건너갔던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네델란드와 벨기에 등 저지대 지방에 살면서 고된 삶을 살았지만, 신앙적으로는 큰 영향을 끼쳤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를 거부하고,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예배를 올리는 참된 교회를 세워나갔다. 잉글랜드에서 피난 길에 올라 영어성경 번역에 앞장섰던 윌리엄 틴데일은 안트워프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저술과 성경 번역을 하던 중에 1536년 화형당했다. 그런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입은 귀도 드 브레는 뚜르네에서 개혁교회를 세웠고, “벨직 신앙 고백서”(1561)를 작성하여 과격한 반역자들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1567년부터 ‘80년 전쟁’의 첫 전투가 벌어졌던 발렝시엔이 점령당할 때에 드 브레도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순교했다.

이처럼 네델란드 주변 저지대 지방에는 순교의 피가 흘렀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윌리엄 에임즈는 네델란드 라이든과 홀랜드 지방에서 신학교수로서 있으면서 개혁주의 정통신학에 확고히 설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 네델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개혁주의 교회를 국교회로 결정했다. 그 후로 지난 사 백년 동안 개혁교회는 네델란드와 저지대 지방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참된 예배를 회복시켰다. 세계 식민지 쟁탈과 해외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네델란드에서는 걸출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방대한 정통 신학의 교과서를 펴냈고, 전세계 교회에 참된 복음의 체계를 깨우쳐 줄 수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카이퍼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네델란드 수상이 되어 인본주의 혁명의 물결을 막았다. 카이퍼는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교”를 세웠고,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높이고 찬양하도록 적극적인 활동을 격려했다. 이처럼, 약 4백 여년 동안 네델란드에서는 청교도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되었고, 자녀 교육에서도 교회가 중심에 있었다.

이제는 바로 그 네델란드 교회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지난 날의 영광은 사라지고 말았다. 자유대학교에서 기독교 신학부는 종교학의 일부가 되었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관심밖에 내몰려 있다. 네델란드는 동성애와 마약과 성매매를 공적으로 허용하더니,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변질되고 말았을까? 2023년 공식적인 종교통계를 보면, 15세 이상 네델란드인 중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절대 다수가 되었다. 전체 국민들 중에서 12%가 종교행사에 참석한다고 하니, 거의 대부분이 교회와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암스테르담 중앙 기차역 근처에 있는 칼빈주의 교회는 음악 연습실로 사용되고 있고, 각 지역 교회들도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유럽의 교회들이 무너진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과 개혁신학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상이나 제도가 오래 동안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나라는 망하게 되며,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사람은 스스로 무너진다. 어느 국가나 개인이나 우상숭배에 빠진 후에는 가치의 혼란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렘브란트와 고흐의 비극적인 생애

네델란드의 교회가 무너진 모습은 두 화가의 몰락과 거의 비슷하다. 네델란드가 전세계에 자랑하는 두 화가는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들은 화가로서 예술적인 천재성을 발휘한 사람들이었지만, 개인적인 인생은 몰락하고 말았다. 사람도, 사회도 모두 변질되어 몰락한 것처럼, 교회들도 역시 성경을 벗어난 신학에 물들게 되면 무너지고 만다. 필자는 네델란드가 자랑하는 두 화가의 비극적인 인생이나, 네델란드 교회가 폐쇄되는 과정이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들 두 천재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고자 암스테르담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온다. 이 두 명의 걸출한 화가의 전시실이 불과 30분 거리에 있어서, 편리하게 두 곳을 돌아볼 수 있다.

“돌아온 탕자”와 “야경”을 그린 렘브란트의 미술관은 국가 최고의 전시실이다. 그는 빛의 화가였다. 어둠과의 대조를 통해서, 살아있는 듯한 광경을 그려냈다. 그의 탁월한 솜씨는 당대에 유명한 화가로 인정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는 개신교회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성경에 나오는 장면들을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해외 무역에 기회가 열리면서, 갑자기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신흥귀족들에게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당시 왕실과 부유층들은 전세계에서 들어오는 고가의 수장품들을 수집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동양과 아랍문명의 진귀한 물품들은 왕궁과 귀족들의 장식장을 꾸몄다.

렘브란트도 그런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너무나 큰 집을 매입했는데, 과도한 확장과 소장품들로 꾸몄다. 그는 진귀한 예술품들, 고대 유물들, 골동품들, 메달들, 해상식물 등 감당키 어려운 물건들에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재정상 파산했다. 행복하게 살던 집도, 아들도 잃었고,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구걸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하나님의 품에 갔을 때에, 아마도 그가 그린 불멸의 그림처럼, “돌아온 탕자”를 품어주시는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

더 슬픈 주인공은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그의 그림들 중에서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자화상” 등 모두 다 강렬한 빛과 터치가 눈으로 파고들어 온다. 전세계 사람들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과 비극적인 생애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의 생애 동안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까? 정말 단 한 점만 팔렸다는 것이 사실인가? 빈센트는 결혼도 실패했고, 작품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와도 결별했다. 네델란드를 떠나서 파리와 플랑드르 지방을 전전했고, 끝내는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37세에 자살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개혁 교회의 목회자로 시골 목회에서 헌신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개혁신학의 자부심을 갖고서 오직 성경만을 따르고자 했던 아버지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작품을 더 칭송했으니, 빈센트가 품은 사상은 극한 혼돈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정신 세계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그의 동생 테오 부부와 조카의 수고로 많은 그림들이 보전되어서, 사후에라도 천재의 색감이 인정을 받고 있다.

렘브란트와 고흐의 개인적인 슬픈 이야기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한 심령에는 어두움이 있을 뿐이다. 화가로서의 성공이라는 것도 모두 다 지나가는 것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이다.

다른 복음과 변질된 신학을 분별하자

그렇다면, 교회와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오늘날 유럽 사회의 세속화와 극단적인 쾌락주의, 무신론에 근거하는 이기적인 타락현상들은 사탄의 계략에서 나온 것들이다. 영적인 혼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몰락시키려는 자들은 자율적인 의지를 작동하라고 부추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두움을 부추기는 자들이 그런 세력의 하수인들이다. 지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의심을 불어넣고, 성도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쳐서, 급기야 교회의 분열화 혼돈을 부채질한 자들은 소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라고 알려진 신학자들이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영향을 입은 현대 신학자들이 교회를 초토화 시켰다. 그중에서도 루돌프 불트만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1930년대 독일 루터파 교회의 변질에 책임이 크다. 그는 기독교의 비신화화를 주장하여 유명해졌다. 불트만은 부활이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신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로 박사과정을 마친 린네만 교수는 이것은 성경해석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자신을 세뇌시킨 불트만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성경의 역사성을 비판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을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불트만의 신약적 권위에 의존하면서, 부활 신앙을 잃어버린 독일교회는 히틀러의 독재하에서 무너졌다. 필자는 린네만 박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불트만의 신학에 속지 말라고 강연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필자의 책, 『교회를 허무는 두 대적』에 부록으로 그녀의 고백을 게재한 바 있다.

독일 철학자 니이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작품 속에서, “신은 죽었다”고 떠들었다. 그러자 이를 받아서 “신의 죽음을 주장하는 신학”, 소위 “사신신학”이 등장하였다. 알타이저, 로빈슨, 해밀턴 등이 급진주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교회를 초토화 시켰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신음하던 시대에, 기독교 안에서 이처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혼돈스러운 주장들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의심하는 자들의 생각 속에 있던 교회의 기존 질서와 권위가 무너져내렸다. 현대 교회가 퇴락하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저명하다는 현대 신학자들이 성경을 파괴하고자 내놓은 “전혀 다른 복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에 대해서 저주를 선언했다 (갈 1:8-9.)

21세기 한국교회 앞에 던져진 당면과제는 국가소멸의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다. 코로나 펜데믹 사태 이후로 세계교회가 크게 위축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돌파구를 찾은 것도 아니다. 교회를 훼손시킨 현대의 급진적 신학이 아직도 진짜 복음인양 가라지를 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회의 장래에 대해서 절망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다. 다만 필자가 크게 염려하는 것은 아직도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각종 유튜브 강좌들이 독버섯처럼 여기저기서 옥토를 망치고 있는 현상들이다. 양의 탈을 쓴 목자도 있고, 천사를 가장한 사탄도 많다. 가짜 물건은 진짜처럼 보여서, 겉모습으로는 구별하기 어렵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서 진면목을 알 수 있나니, 부디 여러분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메시지들이 과연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를 철저히 파헤쳐서 냉철하게 판단하기를 바란다. 과연 신학적 토대가 성경적인가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