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에 오후 미주장신대에서 이상명 총장님의 학위논문을 번역하여 출판한, 『우주적 구원 드라마로 읽는 바울 신학』(2024)이라는 도서 출판기념회가 있었습니다. 서평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구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자는 바울 서신을 통해 구원을 하나의 큰 드라마, 곧 우주적인 드라마로 조명했습니다. 성경 언어들, 바울을 둘러싼 당시의 철학, 종교와 세계관을 탐색하며, 저자는 바울 사도의 구원을 거대 담론(meta-narrative)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독서를 하면서 많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투여한 노력과 금전, 그리고 시간 사용을 생각하며 저자의 노고를 치하했습니다.
이 시대는 구원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소위 “참을 수 없는 구원의 가벼움”을 드러내는 시대입니다. 구원의 문턱을 인위적으로 너무 낮추어 “값싼 구원,” “값싼 은혜”가 유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늘 확인해야 할 영적인 건강의 문제입니다.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우리는 행함으로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인가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란 하나의 과정입니다. 믿음의 생활은 여행, 건축이나 농사처럼 성화와 성숙을 포함하는 과정입니다. 추수를 위한 알곡은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성장을 배경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하는 동안에 “구원의 문제를 성도들에게 잘 가르쳤는가”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에서 어떤 성도가 “민 목사가 구원에 대하여 제대로 안 가르쳐주였다” 혹은 “우리 가족 장례식 때에도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선포하지 않았다” 말하며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제게로 돌린다면, 이는 명백한 저의 재난입니다. 이는 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영혼의 의사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니까요.
값싼 구원, 가짜 구원을 피하는 방법은 구원의 복된 소식인 복음을 단순히 지식으로 받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정보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은 죄인인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 대신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믿고, 그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 곧 영접하는 것은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심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구원은 정치적 반응의 차원을 가집니다. 믿음은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내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의 왕권을 수납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개인적 실존적 차원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 구원의 결단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돌아가는 수직적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구원에 동참함으로 우리는 이미 믿음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의 공동체, 즉 교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공동체적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의 드라마는 교회라는 역사적인 공동체를 새롭게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또한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이자 왕으로 모시는 정치적 차원, 그리고 공동체적 연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기독교의 복음 같은 거대 담론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유일성을 주장하는 거대 담론이 종종 억압을 생산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주, 인간, 영적인 세계와 미래를 포괄하는 거대 담론이지만, 그러나 복음이 억압과 소외를 낳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이야기, 신앙의 이야기는 소외가 아닌 사랑,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는 희생, 배제가 아닌 포용을 그리고 상처가 아닌 치유를 전달하는 한편의 위대한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