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날은/ 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이 시는 수녀 시인 이해인님의 <살아 있는 날은>이라는 시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섬세한 시어들로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세상에 나왔을 때 세상이 놀랐습니다. 이 시집을 몇 번씩 읽었습니다. <민들레 영토>를 신학생 시절에 다시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어들을 알알이 가슴에 담는 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많은 신앙시를 남겼고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천주교인들은 물론 기독교 신앙인들도 이해인 시인의 시를 사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시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시인이 전하는 아름다운 기도들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신앙시 중의 하나가 <하나님 당신은>이라는 시입니다. 나에게서 당신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가난뱅이 여인// 나에게 당신을 옷 입히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궁전의 여인//(후략).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인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성도의 실존을 정확하게 담아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는 날은>은 전형적인 신앙시가 아닙니다. 시인의 삶의 고백과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글을 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시입니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시인의 삶과 구도자로 살아가는 수녀의 삶을 절묘하게 녹여낸 명시입니다.

1연에서 시인은 시를 쓰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향내 나는 연필을 깎아 시를 쓰는 시인은 향기로운 글을 쓰고 싶은 소망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언어적 기교로 재미를 주는 글이나 매운맛 나는 비판의 글이 아닌 향기가 나는 글을 쓰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향기로운 글을 쓰려고 향기 나는 연필을 샀습니다. 향기 나는 시어들이 터져 나올 것 같습니다.

   시인은 말에 관한 몇 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중에 <향기로운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향기 나는 말을 남기고 싶은 소원을 노래했습니다.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후략)

   시인은 향기로운 말을 향기로운 여운이 남는 말이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말이고, 남의 좋은 점을 살펴서 알아주는 말이요, 상대와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향기로운 언어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향기로운 언어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향기로운 말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연필로 썼다가 지우며 조탁의 과정을 통해 시를 완성하는 것처럼 말을 다듬어야 말에서 향기가 납니다. 2연에서 시인은 향기로운 시어를 다듬는 모습을 그리며 향기로운 말을 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3연에서 시인은 초점을 전환합니다. 1연에서는 연필을 깎아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 중심이었고, 2연에서는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이 중심입니다. 3연에서는 칼에 깎이는 연필이 중심입니다.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3연에서 시인은 연필을 의인화합니다. 향기 나는 나무가 주는 향기가 아닌 아픔을 묵묵히 견디는 연필의 존재가 주는 향기를 말합니다.

   4연은 좀더 구체적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연필이라고 선언합니다. 4연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사명을 선언합니다. 시인은 자기 뜻대로 글을 쓰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글을 쓰시길 소원합니다.

   5연은 헌신은 다짐입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이 5연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향기를 발하는 목적입니다. 향기를 내는 것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향기를 받으신 후에 시인은 특별한 욕심이나 기대가 없습니다. 상급이나 응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시인에게 주님을 위해 향기를 발하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한 향기를 발한 후에 소멸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 대표, 시인 수필가)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 대표, 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