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면 위험하다. 비행기가 뒤집어진 채 배면비행(背面飛行)을 하면 큰 사고가 일어난다. 더구나 그런 일이 밤중에 일어나면 끔찍한일이 벌어질 것이다. 인생을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사사건건 고집을 부리고 아무하고나 충돌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똑바로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거꾸로 다닌다고 원망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답답하다. 바로잡아 주는 일도 쉽지 않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반듯한 인간을 지으셨다. 바르게 살 수 있는 지혜와 교훈도 주셨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이후부터 사람들은 거꾸로 살았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위험을 경고하셨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듣기 싫은 소리 한다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다. 인간은 자기들이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정당한 배상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배상 금액이 상상을 초월한다. 죽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단순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다. 영원한 죽음이다.
어떻게 하면 배면비행을 하고 있는 그들을 바로잡아줄 수 있을까? 누가 죽음의 길에서 그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북쪽에 있는 시리아 온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빠른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마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4:25).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5:1,2).
이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보자.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무리들이 찾아왔다.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무리들을 데리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다. ‘보셨다’는 행위와 ‘올라가셨다’는 행위 사이에 가느다란 불연속선(不連續線)이 보인다.
갈릴리 동편 거라사의 마을에 올라가면 호수를 향하여 솟아오른 절벽이 있다. 골란 고원의 서쪽 끝이다. 그곳에 있는 낮은 돌담에 걸터앉아 호수 건너편의 가버나움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나절을 보낸 적이 있다. 마침 맑은 날씨여서 호수 건너편의 먼 산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예수님이 사셨던 가버나움에는 이제 몇 개의 기념교회만 남아 있다. 가버나움의 뒷산으로 눈길을 주면 밋밋하게 올라가는 지형들이 펼쳐진다. 그날도 예수님께서 그 낮은 산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아마도 무리들은 산 아래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란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권능을 보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그들은 제자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부르셨다. 제자들에 게만 비유를 해석해주셨다. 그리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부탁하셨다. 무리들 가운데는 장차 제자가 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 교훈을 주셨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말씀들이다. 그러나 마태는 그 교훈을 5장부터 7장 사이에 잘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다른 두 복음서들과는 달리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시점도 이 교훈 이후에 두고 있다. 이 단계를 지나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가 되는 길로 들어가 보자.
제자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마태 자신의 신앙간증이다. 마태는 그날 산 위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여덟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선물로 받는다.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다. 가난해서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눈과 비를 피할 집 한 칸도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복이라는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심령’은 우리의 ‘영’을 말한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A. Wilard)는 그의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켜 ‘영혼의 파산선고를 받은 자’라고 표현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도 없는 절망적인 실존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인간을 향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용어다. 이 폐기 처분된 영혼을 되살려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복이 있단다.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멸망당했던 사람,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죄와 악으로 사망선고를 받았던 사람, 멸망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 은혜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심령의 가난함이 드러난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이 처한 영적 파멸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 없이 가난한 심령을 가져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종교적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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