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목사의 이스라엘 회복 사역의 이면에는, 47년 전 불치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한 사람의 기도와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이 있었다. 그 기도와 비전의 주인공은 김인식 목사와 40년 이상을 함께 해온 김웅자 사모이다. 70년대 한국의 부흥사로, 저녁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진행되는 철야기도를 이끌었던 김 사모는 지난 2월 26,27일(월,화) 양일에 걸쳐 LA 또감사교회에서 진행된 <성경, 빅픽처를 보라!>의 LA 제 1차 세미나에 게스트로 서서 이 사역을 이끌어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간증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은 기독교 가정 출신으로, 가족 예배가 일상이었다는 김 사모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러나 고 1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김 사모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 3년 동안 5번도 도시락을 못 싸갔고,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대학을 포기한 김 사모는 서울에 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4살이던, 1977년 3월, 갑자기 김 사모는 몸의 이상을 느꼈다. 고려대 부속 병원에서 재생불량성 빈혈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6월 28일, 김 사모는 밖에 나갈 힘이 없어서 방에 누워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려서 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고 교회 가서 죄인이라고 하는데 믿어지지 않았다.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의 뇌리에 떠오른 성경 구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은 정해진 것이구나. 나를 어떻게 심판하실까 생각하는데 눈물이 났다.”
“갑자기 마음 가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너 책을 많이 읽었느냐?’ 이 질문이 떠올랐을 때, 내가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대답 했다.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럼 너는 성인들의 책도 많이 읽었느냐?’, ‘네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그럼 너, 나에 대한 책도 읽었느냐?’ 그때 깜짝 놀라 일어나서 앉았다. 한번도 책을 쓴 적이 없는데 갑자기 나에 대한 책이라고 하니 내가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의 센텐스를 만들었다. ‘나에 대한 책을 읽었느냐 라고 묻는 너는 누구냐?’, 라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나는 예수다’. 제가 성경 한 번도 안읽었다. 저희 어머니의 회갑 때 소원이 ‘주일 성소’였기 때문에 우리 식구는 주일성소는 지켰지만 성경은 안 읽었다.”
그 음성을 들은 6월 28일, 그는 성경을 읽겠다고 결심했고, 7월 1일부터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기도에서 김 사모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성경 한번 읽고 죽게 해주세요. 천당 있다면 분명히 가르쳐주세요. 제가 죽더라도 어머니와 형제들이 슬퍼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읽어도 천당 지옥 얘기가 없었다. 1977년 7월 7일 민수기 12장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해서 문둥병에 걸리는 장면을 읽다가, ‘성경의 신은 도덕적이지도 않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이 죽는 순간이었다. 문이 모두 닫혀 있는데 하얀 종이장이 들어오더니, 그것이 검은 종이장으로 변하더니, 다시 그것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바뀌고, 그 사람들이 저를 묶어서 캄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사람들에게 끌려서 캄캄한 곳으로 갔는데 갈수록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머리카락 한 올 같은 빛이 보였다. 그 빛을 보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세번째 똑같은 기도를 하자 저를 묶었던 붕대가 풀어지면서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았다. 저를 묶던 자들을 도망쳤다.”
그의 앞에 오색 찬란한 빛의 무대가 펼쳐졌고 흰 빛의 천사들이 하늘을 가득 둘러쌌다. 그 순간 그동안 들었지만 믿지 않았던 중고등부 전도사님의 설교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도사님 설교사 사실이었군요. 이제는 믿습니다.’ 그가 막 감격하고 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빛에서, 모든 분위기를 만드는 빛을 목격했다. 그 빛은 온유, 평화, 행복의 빛이었다.
“예수님께 용서해 달라고 엎드렸다. 제 머리에 손을 대는 것을 느꼈고 그 빛 속에 제가 같이 올라가는데 제 입에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가 끊이질 않았고 0.00001%의 근심도 없이 구름 위로 들려 올라갔다. 예수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날의 사명을 지금까지 붙잡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날 예수님이 저에게 말씀하셨다. '사랑한다 웅자야. 네가 이 선을 넘으면 세상 사람들은 너를 죽었다고 한다. 아직 너는 이 선을 넘어올 때가 되지 않았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주가 되는 것과 예수가 이 땅에 올 날이 가깝다고 외쳐라. 그리고 너는 유대인 선교를 하게 될 거야’”
“예수님은 위로 올라가시는데 저는 안 올라가져서 제가 목이 터져라 불렀다. ‘예수님. 믿는다니까요. 저 좀 데려가 주세요’ 그러자 아까와 같은 얘기를 하셨다.”
그리고는 하늘 문이 닫혔고 제가 내려 앉으니, 저는 미아리 신성 장로교회였고 이제 막 목사님이 찬송가 387장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를 부르며 새벽예배를 시작하고 계셨다.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본 주님의 얼굴 빛을 생각하면 지치지 않고 47년을 올 수 있었다. 새벽기도 한번 빠지면 철야 하는 기준을 세웠는데 3일 철야를 하게 되었다. 3일째 되던, 10월 24일 새벽에 다시 한번 놀라운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날 저에게, ‘밤 10시부터 1시까지 3시간을 기도하라’는 음성을 주셨다. 그때 몸이 많이 좋지 않았다. 그 기도라도 하고 예수님을 만나야지라는 생각으로 기도했다. ‘오늘 제가 여기서 자다가 죽으면 저를 받아주세요.’ 그날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방언과 방언 통역을 받았다.
그때 받아 적은 내용을 김 사모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며, 그것을 놓고 매일 기도했다고 말했다.
방언을 받은 후 김 사모는, 당시 방언을 인정하지 않았던 UBF를 방문해 방언에 대해 간증을 나눴다. 방언에 대해 간증한 다음 날, 그에게 서울대 UBF에서 두 학생이 그를 찾아와 그를 반박하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는 그들을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방언도 있고 통역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한 예언대로 그 학생은 목사가 되었다.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웠던 김 사모는 결혼에 대한 계획도, 생각도 없었다. 그런다 사역을 논의하기 위해 만남인 줄 알았던 자리에서 김인식 목사가 결혼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직접 거절하지는 못하고 20일을 기도해 보겠다고 말했다. 바로 거절하기 미안하니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18일째 되던 날 한 선교사님에게서, 또 권사님에게서 전화가 와서, ‘전도사님을 위해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말이 계속 나와요. 전도사님 옆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었는데 거절하지 마세요.’
김 사모는 47년 전에 준 약속, 예루살렘과 유대인 선교에 대한 비전을 김인식 목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체화하셨는가를 증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