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시인
 김현승 시인

굽이치는 바다와시인 김현승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평생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마지막도 특별합니다. 숭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하다 하나님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인은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 장시(長詩)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가 ≪동아일보≫(1934)에 게재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신앙과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는 우리 세대의 신앙인이라면 가을에 한 번쯤 읊조리는 싶은 시입니다. 이 시는 가을, 감사 그리고 신앙이 어우러진 명시입니다. 가을이면 단풍과 낙엽이 떠오르듯 '가을의 시' 하면 바로 이 '가을의 기도'입니다. 이 시 때문에 김현승을 '가을의 시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시는 완전한 기도시가 아니지만 경건하고 겸허한 기도의 분위기를 충분히 담고 있습니다. 신앙시로 손색이 없습니다. 아울러 시로서 수준 높은 시입니다. 이 시는 음유하기에 좋은 아름다운 시어와 운율이 잘 짜여 있습니다. 기독교적 신앙과 가을의 향취를 잘 드러내는 멋진 시입니다.

시인은 가을에 기도의 결실을 추구합니다. 겸허한 모국어로 기도하는 가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지만 가을은 마지막을 생각하게 하는 경건한 계절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인생의 유한성과 마지막 지점을 보게 하는 가을은 우리를 겸허하게 합니다. 그래서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가을의 기도는 열매이자 씨앗입니다. 시인은 가을에 또 다른 결실의 필요성을 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과 자신의 영혼 돌보기입니다. 모두 끝이 보이는 가을에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종말의 시각으로 기도, 사랑 그리고 자성을 통하여 '더 성숙한 가을의 풍성'을 준비하는 영성 충만한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