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최초의 변증가 “순교자 저스틴(로마식으로 유스티누스라고 부른다)은 2세기 기독교 대표적인 변증가였다. 저스틴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었던 교부로 그 어려운 시절에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는 “제 1변증서”, “제 2 변증서”,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 등밖에 없다. 그의 저작물은 기독교 변증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자료요 동시에 2세기 교회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저스틴은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를 그리스도교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다. 그는 그리스의 우주적 로고스를 그리스도에 연계시키는 아주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또한, 그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이 입는 외투(pallium)를 걸치고 순회 설교자가 되어 돌아다니면서 기독교 진리를 강론했던 독특한 전도자였다.
저스틴의 주장과 이론들은 후대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테오필루스(Theophilus), 터툴리안(Tertullian), 펠릭스(Minucius Felix)등의 신학과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저스틴은 이단들의 폐해를 알았고 이단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군주신론(Monarchianism), 그리고 오리겐주의(Origenism)등에 맞섰다.
저스틴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 인근에서 살았던 그리스인 가정에서 출신이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저스틴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익숙했고, 그는 고전 교육을 받았고, 식지 않는 진리에 대한 갈증 덕분에 그 시대의 철학과 사상들을 다양하게 익혔다.
구체적으로 그는 스토아주의(Stoicism), 소요학파(Peripateticism), 피타고라스학파(Pythagoreanism), 그리고 플라톤주의(Platonism)를 섭렵했다. 그런데 그가 여러 철학을 섭렵했지만, 그 어떤 철학도 저스틴의 영적 혹은 심적 갈증을 해갈시켜주지 못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호하셨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련하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추종하는 자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등록금을 받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피타고라스 철학자들은 음악, 수학, 그리고 기하학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영적 갈증과 목마름을 해소하지 못한 유스티누스는 방황하게 되었다. 이런 진리를 추구하는 그의 마음이 그를 기독교로 이끌었다.
진리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을 추구하는 이런 철학들에 대한 공허함을 가진 저스틴은 132년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느 날 한 노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 노인은 저스틴이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 노인은 철학의 무능력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 노인은 플라톤의 생각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그 노인은 철학자들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을 통해 완전한 영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았던 이스라엘의 고대 선지자들에 대해 알려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했다. 유스티누스는 그 대화 후에 바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저스틴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자신은 철학자고 자처하며 살았다. 기독교 철학자임을 자처했던 그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AD150년경에 기독교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로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고 그의 박식함, 다양한 관심 그리고 이단에 대한 단호한 태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고 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다.
저스틴의 글들을 보면 과거 자신이 플라톤 철학자임을 내세웠던 것처럼 스스로 기독교 철학자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헬라) 철학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말은 후대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사람이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논쟁을 낳은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저스틴의 저서 중 일부는 유실되었다. 그러나 짧지만 중요한 변증적 저서 세 편이 남아 있다. 저스틴의 “제1 변증서”는 아마 155년에 순교한 폴리갑 감독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저스틴은 당시 로마 황제에게 담대하고 강경한 어조로 그리스도인들을 보다 공정하게 대우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던 상황에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재판의 과정도 없이 즉결 처결해 버리는 것에 대해 강하게 항변했다. 당시 그의 어조는 아주 강했다. 폴리갑 감독의 처형 후 그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들고 황제를 찾아갔다.
저스틴이 황제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렇다. “만일 우리가 악한 자로 유죄 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혹은 사악한 죄가 입증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부당한 학대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를 죽일 수 있다 해도 우리를 해치지는 말아주시오”라고 요청하였다. 이글이 폴리갑의 사형 직후에 황제에게 전한 항변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순교자 저스틴은 162년 로마 권력자들에 의해 로마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사형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그의 “변증서”에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미리 암시해 둔 대목이 있다. 그는 로마의 당국자들에게 끊임없이 그리스도교를 변호하고 항변하는 공개서한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 서한들을 로마 황제와 당직자들이 읽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 복음을 당당하게 변증해야 함을 천하에 천명했다. 그가 이런 서신을 황제에게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과 도전이 되었고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지지를 보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복음으로 당당한 그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감동과 도전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