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12년간 목회를 했다. 그는 그야말로 명설교를 남겼다. 크리소스톰의 명성을 전해 들은 로마 황실의 실력자 중에 궁내 대신 (황궁 시종장) 에우트로피우스가 있었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궁내 대신 에우트로피우스는 황제에게 강력하고 집요하게 요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추천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테오필로는 자기 사람을 콘스탄티노플에 심으려 했다. 테오필로는 크리소스톰을 싫어했고 그가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에우트로피우스는 황궁 사무국에 입수된 테오필로 주교를 고발하는 문서를 테오필로에게 보여주며 테오필로의 입을 막았고 테오필로도 자기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소스톰 자신도 콘스탄티노플행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황실이 원하는 성직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루돌프 브랜들레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는 다분히 정치적인 처세가 요구되었다고 한다. 크리소스톰의 전임자 넥타리우스는 전형적인 정치적 성직자였다. 넥타리우스는 암브로시우스처럼 성직을 서품받기 전에 관리였고 세례도 받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았고 황실의 비위를 맞출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반면에 크리소스톰은 인문학 훈련, 건전한 신학 훈련, 수도원에서 경건 훈련 그리고 성공적인 목회 경험을 가진 건강한 목회자였다. 그는 안디옥에서 성도들의 강력한 추종과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콘스탄티노플로 가기를 진심으로 거절했다. 황실은 크리소스톰을 납치하듯 콘스탄티노플로 데리고 왔다. 크리소스톰은 398년 2월 26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취임했다.
로마의 황궁 시종장 에우트로피우스가 왜 요한 크리소스톰을 그토록 원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다. 황실을 위한 좋은 설교자를 원했는지, 모든 죄악의 비판자로 알려진 요한이 원로원과 싸워 줄 것을 기대했는지 알 길이 없다. 여하간 당시 막강한 세도가가 요한 크리소스톰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수도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황궁과 너무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생활을 질타했다. 아울러 그는 신자들에게도 윤리적 생활을 강조했다. 그리고 에베소(Ephesus)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해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성직자를 면직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와 나눔 사역을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엄청난 충격을 주는 교회 개혁이었다.
크리소스톰은 스스로 개혁을 실천했다. 크리소스톰은 목사관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고 수도원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봉급을 털어 나눔을 실천했다. 또 교회 헌금으로 화려한 연회 배설이나 건물 건축을 금했다. 팔라디우스는 자신의 책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관한 대화>에서 크리소스톰은 헌금의 낭비를 신성 모독으로 여겼다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재정 감사도 아주 꼼꼼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젊어서 수도원을 찾아갈 만큼 도덕적 삶을 추구하였다.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콘스탄티노플 성직자들의 삶은 지나치게 안락하고 풍족했다. 부패한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는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를 징계하고 부잣집을 기웃거리던 도시의 수도사들을 수도원으로 보냈다. 하성수 박사는 <나사로에 관한 크리소스톰의 강해서>에서 ‘크리소스톰은 당시 주교가 누렸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소박한 방식으로 바꾸었다’라고 전한다.
크리소스톰은 설교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을 선포하면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크리소스톰은 교회 부동산을 정리하여 병든 사람과 나그네를 위한 시설을 준비했다. 그는 상류층 귀부인들의 도움을 받아 여자 봉사자들과 과부들이 행하는 사회사업을 재조직했다.
그는 또 콘스탄티노플 교외에 나병을 위한 병동 건립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별장을 가진 부자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하지만 크리소스톰의 사회복지 사업에 대한 비전은 시대를 앞섰다. 요한의 위대한 본보기는 후대의 교회가 사회를 섬기고 약자를 돌보는데 길잡이가 되었다.
크리소스톰의 개혁에 성도는 열광했다. 하지만 이런 개혁은 성직자들, 수도사들 그리고 로마 황실을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격렬하게 크리소스톰의 개혁 작업을 비난하고 반대했다. 가장 극렬한 반대자는 그를 주교로 세운 알렉산드리아 테오필로 총대주교였고, 그는 황실과 결탁해 크리소스톰을 핍박했다.
그는 황실 특히,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따라서 그의 황실과의 관계는 심히 좋지 않았다. 그는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 퀘르치아(Quercia)주교회의에서 모략으로 면직되었다. 당시 로마의 아르카디우스(Arcadius)황제는 이 결정을 수용해 그를 비두니아(Bithynia)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큰 지진이 일어나는 등 이상 기후가 나타나자 놀란 에우독시아(Eudoxia)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귀환했다. 콘스탄티노플에 복귀한 그는 잠시 평안을 누렸으나 2달 만에 황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황제는 404년 부활절에 다시 크리소스톰을 체포했다. 그의 체포를 반대하는 성도들이 강력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황제는 그를 아르메니아 지방 쿠쿠수스로 유배시켰다. 성도들은 그를 만나려고 가는 것을 성지순례로 여겼다. 크리소스톰을 찾아가는 신자들 행렬이 계속되고 쿠크수스가 논란의 중심에 서자 황제는 그를 흑해 동편 피티우스(Pityus)라는 외딴곳으로 가게 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너무 쇠약해 걸어서 유배지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잔인한 그의 대적들과 군병들은 그를 맨발로 걷게 했고, 채찍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의 한계를 느끼고 인근 교회를 찾아가 성찬식을 하고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눈을 감았다. 크리소스톰은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