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페르시아 제국과 새로운 언약공동체.
바벨론 제국이 교회를 심판하는 도구였다면,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는 교회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도구이자 새로운 정치적 경험이었다. 이사야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내 목자”(사44:28)이자 “기름 부음 받은 자”(사45:1)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백성을 심판하시되, 바벨론 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경륜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유대민족은 국가적 정체성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소수의 지도자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난 뒤, 하나님의 통치는 고레스 왕을 세우심으로 분명하게 유지되고 있다. 국가적 정체성은 상실하였지만, 유대민족은 이제 성전 공동체로 민족 공동체로 존재하고, 유대 공동체는 우호적인 페르시아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한다. 페르시아의 통치를 배경으로 하는 이사야 56-66장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제국의 질서가 유대민족에게 어떠한 역사적 대안과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1. 종교ㆍ문화적 공동체로서의 구약교회.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은 유대민족이 귀환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는 때에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그들은 당시 주권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도, 종교ㆍ문화적 공동체로서 “제사장 나라”(priestly kingdom)로 존재하였다. 이사야 56-66장의 배경은 바벨론이 고레스에 의하여 멸망된 기원전 539년 이후이다. 페르시아의 통치 가운데서 국가로서의 유대왕국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하여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를 체험했으나, 더 이상 독립 국가의 주권은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구획과 결정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재고하도록 하는 상황을 부여하였다.
다윗 왕조의 위신과 영광의 회복은 단지 시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남아있게 되었다. 왕조와 정치적 장치 및 군대의 공존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적 주권은 상실되었으며, 그것은 이전의 경험으로만 남았다. 이미 바벨론 시대를 통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국가적 정체성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일신(monotheism) 하나님의 권세를 열방 가운데서 드러내 보여주심을 계시하였다. 이사야 56-66장의 가르침은 이러한 종교ㆍ문화적 생존의 기반에서, 오히려 유대민족이 페르시아의 통치의 광활한 영역에 이르러 신앙적 영향력을 재건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제국의 권력을 독점하게 된 고레스 황제는 관대한 문화적 수용정책을 세워 유대 종교를 회복시킨다. 유대인 공동체가 교회라면, 이제 그 교회는 한 민족에 국한된 실체가 아니다. 국내와 국제 문제에 대하여 짐 지지 않고, 또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여 없이도 존속이 가능하며, 동시에 세계적인 공헌이 가능한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진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가진다. 성전은 존재하나, 미래의 공동체는 열방의 타민족에 대하여 열려있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야 56-66장이 왕조의 회복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으로 그 노래를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골딩게이는 이사야 56-66장의 신앙공동체의 회복을 일목요연하게 대칭 구조로 정리한다. 여기서 소개되는 미래의 공동체는 유대인으로만 이루어진 민족 공동체가 아니다. 이 미래의 위대한 공동체는 이방인이 안식일을 지키고 예배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며, 본토인과 이민자의 차별이 극복된 다문화의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의 미래는 또한 정의를 지키며 공의를 행하는 공동체이다(사 56:1-8, 66:18-24). 이 공동체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확장되며,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이웃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공동체이다(56:9-59:8, 65:1-66:17). 미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회개로 응답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59:9-15a, 63:7-64:11).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점차 대칭 구조의 중심으로 이동할수록, 단수로 표현된 중심인물에 대한 언급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60-62장에 이르면 위르겐 몰트만의 주장처럼 이 공동체의 회복은 “메시야의 도래”로 초점이 맞추어지며, 그의 도래로 해석하여야 그 예언의 성취를 신약과 관련하여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골딩게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사야 60-62장의 성취는 부분적이라고 본다. 결국 더욱 분명한 이사야의 예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보다 더 완벽하게 성취되기 때문이다.
존 골딩게이의 이사야 56-66장 구조분석
A 56:1-8 서문: 여호와의 예배공동체 속에서 이방인의 위치
B 56:9-59:8 예루살렘 공동체에 대한 여호와의 도전
C 59:9-15a 여호와의 용서와 회복을 위한 기도
D 59:15b-21 심판하시는 여호와에 대한 비전
E 60:1-22 회복된 예루살렘의 비전
F 61:1-9 예언자의 출사표
E ́ 61:10-62:12 회복된 예루살렘의 비전
D ́63:1-6 심판하시는 여호와에 대한 비전
C ́63:7-64:11 여호와의 용서와 회복을 위한 기도
B ́65:1-66:17 예루살렘 공동체에 대한 여호와의 도전
A ́́66:18-24 후기: 여호와의 예배공동체 속에서 이방인의 위치
2. 제국 속에 존재하는 메시야 공동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를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국가에 대하여는 잠정적 역할만을 인정하였다.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 왕조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왕국이 영광스러운 위상으로 존재하였으나, 정치적 영광을 가진 국가는 종국적인 가치를 가진 실체가 아니었다. 국가적 공동체는 단지 섭리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잠시 필요하였다. 신명기 17장에 그려진 이상적인 국가의 범주를 벗어나 유대의 왕들이 언약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때, 지도층과 백성은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 되었고, 이는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되는 타락한 제도가 되었다. 이제 유대왕국은 그 상대적이고 한계 지어진 조건적 임무를 감당하다가 바벨론 제국 아래서 붕괴되었으며, 교회는 포로 생활 이후 오직 종교ㆍ문화적인 공동체로 존재하고 발전했다.
포로기 이후의 회복은 이사야에 의하면, 예루살렘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회복된 새로운 예루살렘 공동체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와의 종”에 의하여 이끌리고 인도된다. 출사표를 내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목자는 정치적 지도자인 고레스와는 매우 다른,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세운 메시야로서 성령으로 충만한 자이며,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는 지도자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날과 보복의 날을 선포하는 자이다(사 61:1-3).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바로 이 성경을 펴시고 인용함으로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셨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는 것을 나누어, 초림과 재림을 날카롭게 분리하신다. 초림에는 전자를 이루는 것으로 선포하시고, 신원과 보복의 날을 메시야의 재림에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가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열방을 심판하는 메시야의 통치 또한 종말적 상황으로 연기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원수 갚는 재림의 날은 열국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는 메시야의 출사표에 묘사된 임무가 아니며, 도래할 미래의 메시야는 고레스가 시작한 “아카이메니드 행정부”(Achaemenid administration)의 행태를 따를 수 없다.
귀환한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고레스의 아카이메니드 행정부의 재현이 아니라면, 앞으로 도래할 메시야 왕국의 국제정치적 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노만 고트발트(Norman Gottwalt)는 다윗과 솔로몬 시절의 국가적 위엄을 다시 찾아 다른 나라의 조공을 받는 모델은 더 이상 적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트발트는 이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의 새로운 종말론적 모델을 찾아볼 수 있음을 주장한다.
첫째는 회복된 이스라엘은 “주변의 나라와 민족에서 뉘우친 개인적인 회심자들이 돌아와서 피난처와 집회의 장소로 삼는다”는 차원에서의 메시야 왕국이다. 메시야 왕국으로서의 새예루살렘의 구성은 국제적이다. 이방과 열방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영광스러운 행진을 하되, 출애굽의 시대에 온갖 이민족이 함께한 것처럼 다른 민족이 함께 와서 메시야 왕국을 재건한다.
둘째는 국제정치적인 견지에서 이스라엘이 “그 시대의 초강대국, 즉 제국과의 국제적 연대를 이루는 한 파트너로서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대안은 이사야 19:19-25에 이르기까지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선포 곧 그 종말의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세계 중에 복이 된다는 예언에 의거한다. 이는 이전의 이스라엘 “지파 연맹체”(amphictyonic league)의 이상을 국제적으로 확장시킨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적 프로그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약속으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나라에 강요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세 번째 종말론적 메시야 왕국의 대안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단일한 세계 제국 속에서 제사장적인 영토가 된다”는 것이다. 이 대안은 페르시아의 팽창에 따른 대안으로서, 2차적 대안의 변용이다. 하나의 주권을 가진 정치적 권위가 모든 중근동의 주권국가를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유대라는 공동체도 그 정치적 질서에 편입되어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공동체로 생존하는 모델이다. 이스라엘이란 이전의 정치적 위상은 상실되고, 이제 페르시아의 한 지방으로서 존재하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전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적 수도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정치적 주권은 상실했지만, 종교적 영향력은 제국 안에서 결코 적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위의 모델 중 하나로 분명하게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유대민족은 이러한 해석학적 다양성의 범주 아래서 회복의 비전을 보았고, 이로써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저항의 정신적 기초를 삼았다. 적어도 미래의 메시야는 이스라엘 내부의 민족적 장벽에 막힌 나이브한 군주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아가 미래의 메시야가 “고레스적 메시야관”을 가지는 것과 유사하다면, 회복된 메시야 왕국은 적어도 다민족적 외연을 가질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앞으로 도래할 메시야 왕국은 내부적으로는 정의와 공의를 담지한 의로운 왕국이다. 또 미래의 왕국은 변치 않는 ‘신정적 공동체’(theocratic community)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제국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서, 정치적 주권보다도 더 중요한 공동체적 함의는 앞으로 도래할 신약의 메시야 운동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적 측면을 가진다.
VI. 제국의 시대에 읽을 이사야의 정치신학.
제국의 문제는 지난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제국은 오늘 이 시대에도 국제정치 분야뿐 아니라 신학에서도 학문적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목민신학의 목회적 함의와 함께 외연을 제국과 국제관계로 확장시키는 일은 아직도 많은 연구의 부분이 남아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이사야에 대한 국제정치적 해석은 많은 과제에 비하면 아주 미흡한 잔도공의 작업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길에는 아직도 절경과 숨겨진 비경은 물론 새로운 신학적 발전에 이르는 대로가 존재하리라 여겨진다. 다만 여기서는 이사야서에 대한 목민신학의 외연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때 발견할 수 있었던 것 몇 가지를 요약하려 한다.
첫째로 이사야가 다루는 제국 앗시리아,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질서는 각기 상이한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정치신학의 차원에서 제국에 관한 교회의 대응이 일률적인 반응이 아니라 다양한 반응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먼저 유대왕국은 굴복이냐 저항이냐를 선택할 수도 있었고, 멸망한 민족으로 국가 없이 회복되어 변방의 일부로 존재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와 같은 친화적인 제국은 구약의 교회였던 이스라엘의 외곽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보호와 회복의 동심원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둘째로, 이사야의 예언은 놀랍게도 친 앗시리아 정책이나 반 앗시리아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강조점으로 부상하는 교훈은 아하스나 히스기야와 같은 왕이 ‘궁극적인 종주권자인 하나님을 신뢰하는가’의 여부이다.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는 그러므로 국제관계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종주 언약을 맺은 언약 당사자로서 여호와 신앙을 견실하게 지키고 국가적 차원에서 정의를 시행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유대민족의 경험은 한 나라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사적으로 드문 경우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독립의 열매를 맺기까지 각국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종교ㆍ문화적인 독특성을 지속적으로 담지한 공동체를 유지시켜야 했다. 유대 민족은 바벨론의 포로 가운데서 민족적 정체성과 특히 종교적 정체성을 지켰고, 70년 만에 그 민족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회복되는 기회를 가졌다. 해체되지 않은 민족적 정체성은 항상 미래의 회복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다.
넷째, 유대왕국이 황폐화된 후 다시 고토로 돌아가 제사와 영토를 회복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페르시아 제국과 지도자 고레스 왕이 예비 되었다는 것은 깊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제국과 열방의 하나님이시다. 왕이신 하나님의 목민과 통치는 민족을 초월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였던 유대왕국의 영토 상실에도 불구하고 민족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따라서 바벨론 이민 속에서도, 페르시아 총독의 통치하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 세계 속에서 학대받는 민족에 대한 소망과 비전을 제공하고 제국주의적 압제 속에서 고난받는 민족으로 존재하는 터키의 쿠르드족, 티벳의 거민, 중국의 신장 위구르와 내몽고의 민족에 소망을 부여한다.
다섯째,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 사역의 사명 선언으로 이사야 61:1-3을 찾으시고 읽으심으로 활동을 알리신다. 제국 페르시아의 존재 속에서 명맥을 이어온 제2 성전 시대는 로마의 제3 성전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운동을 논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제공한다. 제국 로마의 존재 아래서도 복음의 탈민족적 정체성은 공생애 기간 동안 제국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시작함으로 결국 제국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이른다.
이사야의 정치신학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치로 환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초기 정치의 부분으로 존재하는 민족국가였다가 점차 열방과 제국의 종교ㆍ문화적 공동체로 변형되는 과정(the process of metamorphosis)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 1-39장에서는 제국 가운데에 있는 정치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민족국가로서, 40-55장에서는 정치적인 압제 속에서 주권을 인정받을 수 없는 민족으로, 그리고 56-66장에서는 다시금 회복된 민족으로 종교ㆍ문화적 독립성을 가진 실체로서 드러난다. 이사야의 정치신학은 모든 학대받는 민족의 소망이자 갱신의 사례이다. 민족의 국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존재한다. 교회는 국가의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나라와 열방 가운데서 독특한 정치적 실존으로서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결국 고난 가운데 있는 천국은 제국에 영향을 미치는 독립변수가 될 수 있는 소망을 거둘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