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도 단테의 신곡이라는 문학 작품을 통해 얻은 영적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합니다. 단테의 신곡은 단테가 벨라기우스라는 의인을 만나, 그의 안내로 지옥, 연옥, 천국의 순서로 탐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평소에 우리가 아는 죄보다 훨씬 다양한 죄와 죄에 합당한 형벌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지옥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입니다. 제1지옥, 제2지옥, 제3지옥, 등등, 종류별로 다양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받는 장소도 다 다르고, 형벌의 종류다 다 다릅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믿었으나, 어떤 특정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영혼의 정화를 위해 머무는 연옥도 사람마다 해결하지 못한 죄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영혼의 정화를 위해, 거쳐야 하는 징벌, 즉 수련법도 다 다릅니다. 연옥에는 이 땅에 살 때, 지나치게 음식을 탐했던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영혼을 정화하는 수련법은 각종 과일이 풍성하게 달려 있는 나무 밑에서 열매를 바라보면서도, 결코 열매를 먹을 수 없는 징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인내의 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스꽝스럽게도, 식탐의 징벌을 받는 자들은 모두 깡말랐습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식탐의 징벌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500년 넘게 징벌을 계속해서 당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연옥에는 이 땅에 살 때, 무척 게으르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연옥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누워만 있습니다. 게을러 잠만 잤으니까, 누워만 있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성경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징벌을 당하고 수련한다고 죄의 습관에서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습관을 이기게 하는 것은 회개로 말미암는 예수 보혈의 능력과,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로부터의 해방되는 은혜와 은총은 이 땅에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지옥과 천국의 중간지대에서 수련을 통해 죄를 이긴다는 개념은 허무맹랑한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서, 죄에 대한 몇 가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그 중 한가지는 인간의 죄성이 만들어내는 죄들은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연옥에서 다루어지는 두가지 죄, 식탐의 죄와 게으름의 죄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먹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된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먹는 것이 죄다 싶을 정도로 타락한 때가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에 황제와 귀족들은 먹을 것이 워낙 풍부해서, 먹고 토하고, 다시 먹었습니다. 그 와중에 가난한 자들은 굶어 죽었습니다. 식탐이 문제가 아니라, 탐심과 탐욕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맛집 탐방이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잡은 지금 시대는 어떻습니까? 유튜브에는 먹방 동영상이 가득합니다. 잘 먹고 많이 먹는 사람이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인생에서 누리는 최고의 복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 말씀에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식탐이 저도 많습니다. 그러나, 식탐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보다 다 중요하고 우선시된다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음식뿐 아니라, 사업도, 성공도, 운동도 하나님보다 앞서면, 얼마든지 죄일 수 있습니다.
게으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으름은 사람마다 상대적입니다. 어떤 부지런한 사람의 눈에는 조금만 늦장을 부려도 게으르게 느껴집니다. 반대로 조금 느릿느릿한 사람의 눈에는 정상적인 사람도 부지런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정말 게으르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달란트의 비유는 분명히 "이유가 어떻든 하나님께서 주신 복(물질, 재능, 은사, 시간 등등)을 활용하지 않고, 아무런 선한 열매도 맺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죄의 뿌리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유전된 죄성입니다. 그리고 죄의 본질은 교만, 이기주의, 불신, 불순종입니다. 그런데, 죄의 열매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길이 있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죄고 어떤 것은 죄가 아니다"가 아니라, 그러한 삶의 모습 이면에 어떤 죄악 된 생각과 어떤 악한 동기와 불순한 목적이 숨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예리하게 삶을 돌아보고 묵상하게 되어지면, 우리가 다루고 회개해야 할 은밀한 죄가 상당히 많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해 합리화하는 일이 습관화되면, 우리의 믿음과 양심은 타락합니다. 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도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만큼 죄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더욱 진지하게 다루어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제 죄에 대해서 신경 쓸 것 없으니 걱정 말아라"가 아니라, "이제 죄를 다루고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능력이 생겼으니, 죄와 싸워라"는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은밀하고도 교묘한 죄까지 다루는 지혜로운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