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지구상에서 가장 암울한 조선 말기에 이 땅을 향한 소망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19세기 말에 벽안의 선교사들을 보내 주시어 우상숭배와 봉건적 신분제와 권력층들의 타락과 문맹으로 소망 없이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과 보편적 가치관인 자유와 평등과 박애주의를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개화된 근대문명을 이식시켜 주었다.

 

그들은 조선에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자들이었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서구근대문명의 전령들(Herald)이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각종 우상숭배와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타락과 종교의 멍에와 가난과 무지에 얽매였던 그 땅에 예수께서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소망의 시대가 열린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 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5,16)

이는 분명 억압적이며 폐쇄적인 조선의 봉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놀라운 섭리의 역사였다. 그 당시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 조선은 너무도 존재감이 없었고 은둔의 나라였기에 세계에 드러내시며 조선 민족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문명화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큰일'이셨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126:3)

세계가 격변하던 19세기에 서구의 나라들은 근대화된 문명과 기독교를 식민지 정책과 함께 온 대륙의 여러 나라를 점령하고 서구의 문명화와 기독교화를 강권하며 실행하였다. 이 시대를 흔히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하였다. 특히 영국과 중국은 1841년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 상해 등지를 비롯한 연안 지역을 조차(租借)지역으로 삼았으며, 그 지역은 근대문명지로 개화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도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한 사역을 한 대표적인 선교사로서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였으며, 선교사들은 점차 대륙의 내지로 확장시켜 나갔다.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북경, 상해, 남경, 천진 등에 대학과 병원을 세워 근대화를 토착시켜 나갔으며 기독교 인재들을 양육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중국 최초의 공화제 총통이며 기독교인인 쑨웬(孫文,1866~1925)과 양계초(梁啓超, 1872~1929) 같은 기독교 교육학자 등을 배출하였다.

중국 선교 활동의 전성기인 1920년대에 19개 성에 약 265개의 미션학교가 있었으며, 학생 수가 7천 6백여 명에 달하였었다. 미션계 대학교에는 약 2천여 명의 학생이 근대교육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07년에서 1920년까지 기독 학생 수가 3배 이상 달하였었다. 이는 중국의 근대화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이었다.

일본도 역시 미국의 군함인 일명 흑선을 앞세워 강제적으로 통상 관계를 강요하자, 이에 굴종하여 1854년에 '일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구 문명이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수백 년 동안 유지해왔던 무사계급(쇼군)의 '에도막부'(막번)시대가 종식(1603~1868)되고 명치유신 시대(1868~1889)로 접어들면서 서구의 문명화가 본격적으로 개화되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제, 세제개혁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였으며 천황의 주도하에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와 내각제, 입법부제(입헌군주제)를 도입하였다. 오랜 동안의 막부 하의 신분제를 폐지하면서 극렬한 저항을 겪으며 새로운 제도를 안착시켰다.

이런 중에 일본은 1876년 조선과의 강화도조약(수호통상조약) 이후 고종에게 왕실 관료들을 수신사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많은 조선 관료들을 파견하였다. 그중에 김옥균, 이수정, 박영효 등을 보내어 일본의 근대화 된 산업 시설과 사회, 정치 등에 대해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 이수정, 김옥균 등은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만나 교류하였고 친분 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이수정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선교사의 요청을 받고 한문 성경에 한글 토를 달아 성경을 제작하였으며, 미국 감리교 선교회에 편지를 보내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혁혁한 개혁과 근대화의 모습을 보고 돌아와 고종에게 조선의 개화를 보고하였으나, 척사파들의 극렬한 반대에 좌절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호같은 급진적인 개혁파들은 봉건적 조선 왕조를 개혁하기 위해 갑신정변(1884.12)을 일으켜 왕정을 입헌군주제로 개변시키려 했었다.

일본의 이런 근대화 되어가는 상황 중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선교사들이 문호를 개방한 일본에 들어가 기독교 일반 학교와 전문학교 설립을 통해 서구의 학문과 농공 분야의 기술을 전수하며 근대 기독교 지식인들을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우치무라 간조'(1861~1930), 경제학자이며 도쿄대학 총장을 지낸 '아나이하라 다다오'(1893~1961),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일본 농업계 지도자인 '이토베 이나조'(1862~1933)같은 걸출한 기독교 교육가를 배출하였다. 대표적 기독교 학교로는 도쿄여자대학, 메이지학원 등이다.

서세동점의 격변기 중에 조선도 그 시대적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으나 그렇게 되기까지 조선 왕실도 약 20여 년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조선은 서구의 공세적인 압박으로 문호를 개방한 중국과 일본이 정치, 사회의 급변된 모습에 두려움을 갖고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1866년 8월에 미국 국적의 상선인 셔만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으로 진입하는 사건과 그해 10월에는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타고 한성까지 들어와 무력시위를 당하는 병인양요를 겪었다.

그 후 1871년에는 미국이 셔만호 사건을 추궁하며 사과를 받기 위해 군함 5척과 군사 1200여 명을 동원하여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신미양요를 1871년에 일으켰다. 그 후 조선은 중국의 리홍장의 강요와 미국의 공세에 눌려 드디어 미국과 1882년 5월에 최초로 서양 문명권이며 해양 세력국이며 기독교국인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 조선은 더 이상 외교적으로는 중국의 속국이나 은둔의 나라가 아닌 세계 속에 속한 자주 독립적인 국가로 세계사에 편입되었다.

이로서 서구의 근대문명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에 선교사들도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관문이 열려지게 되었다. 이들의 한 손에는 성경이 또 다른 손에는 서구 문명이 들려있었다, 그것은 복음화(Evangelization)와 문명화(Civilization)를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