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이준수 목사

2000년 전 십자가 사건 당시, 로마 황제가 파견한 유대 총독 빌라도의 관저에는 두 명의 죄인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두 죄인 모두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바라바 예수'였고 또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마27:17).

바라바는 당시 통용됐던 아람어로 '아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아바'는 아버지란 의미고요. 본명이 예수였던 바라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정치적 영웅으로 추앙 받은 혁명가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유대민족을 해방시켜 옛 이스라엘 왕국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무력 저항을 시도하다 로마 당국에 잡혀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애국적 열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특사로 그리스도 예수 대신 바라바의 석방을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영혼의 구원을 외치며 자기 자신부터 거듭날 것을 요청했던 예수보다는 세상의 혁명적 변화부터 약속한 바라바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하나님의 아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아우성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역사가 증언하는 것은 자신의 변화 없이 세상의 변화를 꿈꾸었던 바라바가 세상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 이전에 자신의 거듭남부터 구하라던 예수가 세상을 구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모든 악에 대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셨고 그 부활 사건으로부터 역사는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두 번 다시 그 이전과 같아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 그것은 거듭남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 죽음을 통한 예수의 거듭남이었습니다. 그 부활이 이후의 세상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혁명가는 세상을 바꾸려고만 하지 자신을 변화시키려 들지 않습니다. 처음엔 눈에 확 뜨이고 신선해 보이던 혁명이 차츰 그 의미가 퇴색하고 가치가 전도되어 구악을 답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변화의 물결 속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의 십자가는 자기변화와 거듭남을 먼저 요구합니다. 세상의 일부인 내가 먼저 변화할 때 나를 둘러싼 세상도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고 수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위한 대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 비판과 개혁을 통해 부정과 부패가 일소되어 한국교회가 보다 건강하게 거듭나야겠지만, 개혁을 외치는 우리들조차도 이 거대하고 포괄적인 개혁의 대상이 되어 미래를 위해 기꺼이 희생되고 변화되어질 수 있다는 각오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개혁은 입으로가 아닌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의 자기 변화와 행동적 실천이 뒤따를 때 견고한 정당성과 지속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준수 목사 (남가주밀알선교단 영성문화사역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