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항일 무장투쟁 내세워야 해, 유해 송환에 부담
봉오동 전투 北에 소개하면, 김일성 보천보 전투 묻혀
유해 있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와 관계도 안 좋아
북한 고위급 외교관 출신 태영호 의원(국민의힘)이 '북한은 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향인 평양으로 모셔가지 못했을까?'라는 글을 18일 SNS에 게재했다.
봉오동 전투를 이끈 후 구소련 공산주의 정권에 협력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같은 공산주의 정권인 북한이 이제까지 왜 송환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 답한 것이다. 최근 교회언론회(대표 이억주 목사)는 홍 장군 유해 송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태영호 의원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이 별세한 지 78년 만에 고국 땅에 안장됐다. 장군의 귀환은 남북한 우리 민족 모두에게 큰 울림이 되고 있다"며 "(북한) 김정은도 오늘 홍범도 장군의 유해 안장식을 보고받았을 것이고, 평양으로 미리 모시지 못했던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태 의원은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정부가 장군의 유해 봉환을 추진하자 북한은 장군의 유해를 고향인 평양에 안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카자흐스탄 측에 한반도가 통일되기 전에 장군의 유해를 고향이 아닌 한국으로 보내면 남북 대결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고 불만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며 "카자흐스탄 측도 장군의 유해 봉환 문제를 둘러싼 남북의 외교전 앞에서 불편하여 한때는 어떻게 할지 머뭇거렸다"고 소개했다.
그는 "북한은 2015년 말 카자흐스탄 수도에 대사관을 개설하겠다면서 한 발 다가갔으나, 카자흐스탄 측은 2016년 1월 북한 4차 핵실험을 계기로 북한 대사관 개설을 불허하였다"며 "그 후 2017년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ICBM 발사를 규탄하면서 북한과의 거의 모든 관계를 동결시키고 한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설명했다.
태영호 의원은 "그렇다면 북한은 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이전 소련 시기 북한으로 모셔가지 않았을까"라며 "우선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김일성을 내세워야 하는 북한 체제상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 |
태 의원은 "북한도 홍범도 장군의 항일 업적을 인정하나, 그 평가에서 남한과 완전히 다르다"며 "김일성은 홍범도 장군이 치른 가장 큰 전투인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홍범도 장군을 연해주 소련 붉은 군대와 함께 싸운 조선인 지휘관으로 묘사했다. 홍범도 장군이 치른 가장 큰 전투는 소련 붉은 군대와 함께 우수리 강변에서 벌어진 '이만 격전'이라고 회고록에서 언급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만일 봉오동 전투를 소개한다면, 북한이 항일투쟁사에서 제일 크게 내세우고 있는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가 묻힐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북한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있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고 밝혔다.
태영호 의원은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는 독립군 후손들은 물론, 8.15 광복 후 소련군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국가 재건에 참여하고 6.25 전쟁까지 참전했다가 1950년대 말 김일성의 숙청을 피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며 "그들은 김일성의 독재 체제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태 의원은 "1990년대 초 이전 소련으로부터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북한이 다시 고려인 사회를 끌어당기기 위해 학교도 세우고 교사들도 파견하고 고려인 예술단도 평양에 초청했으나,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반응은 매우 냉랭하였다"며 "아마 북한이 홍범도 장군을 평양으로 모셔가겠다고 했으면, 현지 고려인 사회가 반발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우리는 한 세기가 지나서야 '나라가 해방되면 고국에 데려가라'는 장군의 유언을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며 "냉전의 대결 구도 속에서 너무나도 오랫동안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던, 중앙아시아에 남아 있는 독립군 후손들을 포함한 고려인들이 우리 한국에서 삶의 꿈을 펼칠 수 있는지 제도적인 개선책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아마 그것이 홍범도 장군이 자신을 고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유언의 본질일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