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습니다(행13:4). 이는 바울과 바나바, 실라와 마가 요한의 선교팀이 도보로 안디옥에서 실루기아로 이동하였고, 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섬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첫 선교여행지 구브로 섬을 향해 배를 타고 출발한 곳이 실루기아 항구입니다.
안디옥을 출발한 선교팀은 육로를 이용해 실루기아로 갔습니다. 두 도시는 잘 발달된 육로로도 연결되었고, 강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는데 물류유통은 주로 강을 이용했습니다. 기능적으로 실루기아는 안디옥이 대양으로 가는 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안디옥은 실루기아를 대륙으로 연결하였습니다. 두 도시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서로 번갈아 위성도시 역할을 했습니다. 두 도시의 독특한 관계는 70년대 서울과 인천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상호 역할을 바꾸어 가며 실루기아 때문에 안디옥이 발전했고, 안디옥 때문에 실루기아가 번성했습니다.
실루기아는 셀류쿠스 니카토로(Seleucus Nicator) 1세에 의해 건설된 항구였습니다. 거대한 헬라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 휘하 장군 4명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그 네 사람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인 셀류쿠스 니카르토 1세는 중동지역을 장악하였었습니다. 셀류코스는 마케도냐의 필립과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황제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셀류코스는 B.C.312년부터 280년까지 32년간 통치하면서 그가 지배한 대부분의 지역에 헬라 문화를 보급하였습니다. 그는 셀류쿠스 왕조를 세운 뒤,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였습니다. 이 과정에 건설된 도시들이 안디옥과 실루기야입니다. 실루기아는 지중해 연안에 교두보로 건설된 항구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실루기아는 의도적으로 조성된 인공 항구 도시입니다.
이 실루기아를 세운 이유는 지중해 연안 강대국들과의 교역을 위한 해양도시 건설이었습니다. 무역과 국방을 위한 일종의 복합 도시였습니다. 해양 무역을 통해 국부를 꾀함은 물론이요, 군부대를 주둔시킴으로 국가방어를 위한 요새로 활용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셀류쿠스 니카르토1세는 새 항구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넣어 실루기아라고 붙렀습니다. 그것은 황제의 이름인 셀류쿠스의 형용사 형태로서, '셀류쿠스에게 속한 것' 또는 '셀류쿠스의 것'이란 의미입니다.
실루기아는 수리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셀류코스Ⅰ세가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도시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따라 실루기아라 명명하였습니다. 따라서 굉장한 애착이 있었습니다. 실루기아는 B.C. 301년 4월 오론테스(Orontes)강 하류 피에리아(Pieria)산록에 세웠습니다. 그래서 종종 실루기아 피에리아(Seleucia Pieria)라고 부릅니다.
실루기아는 사도 바울 당시에 대단한 해양 도시였습니다.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수송과 보급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망실되었지만, 안디옥과 실루기아 사이에는 발달된 도로가 있었습니다. 실루기아는 교통의 요충지인 안디옥과 연결하면서 내륙의 교통망과 해양을 잇는 매우 중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현재 터키 안디옥(안타키아)의 서쪽에 있는 '사만다으' 항구가 실루기아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많은 피서객이 찾는, 제법 북적거리는 도시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는 옛 실루기아 항구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주 소수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유물은 안디옥과 실루기아를 연결했던 도로, 아크로폴리스 신전, 투기장, 둘레 12㎞ 성벽에 쌓인 성문, 등이 있습니다. 바위를 뚫어 건설한 안디옥과 실루기아를 연결한 고대 도로는 바울 선교팀이 이용했던 도로입니다. 유물 중 가장 진기한 것은 길이 1.3㎞의 대암석 수구인데, 이것은 급류의 범람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한 배수 시설이었습니다.
장마철이 되면 피에리아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범람하여 홍수가 났습니다. 빈번한 홍수는 실루기아의 숙제였습니다. 거의 매년 홍수로 도시가 마비되고 항구의 기능도 중단되었습니다. 이는 로마 정부의 치리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실은 실루기아에 오론테스 강변과 항구 시설 보호를 목적으로 티토(Titus)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흐름을 바꾸고자 바위산을 깎아 만든 방수로(放水路)입니다. 도시로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막기 위해 거대한 암벽을 파서 터널을 건설하였습니다.
이 티토 터널은 실루기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설입니다. 로마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황제가 공사를 시작하고 아들 티토(Titus)황제가 완공한 터널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죠세푸스는 티토 부자는 예루살렘성을 함락시키며 체포한 유대인 노예를 동원해 이 터널을 건설했다고 기록합니다. 티토는 장군시절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며 유대인의 저항에 부딪혀 고생을 했습니다. 티토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통해 경험한 유대인들의 공사 실력을 믿기도 했고,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감도 있어서 어렵고 힘든 티토 터널 공사를 맡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