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군대에 있을 때 일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군대로 갑자기 연락이 오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우야, 성경을 읽는데 원수를 사랑하라 하더라. 내 원수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니까 그 "이진민"이더라. 그래서 용서한다고 기도했는데, 용서해줘도 되겠나? 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 아이가."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15년간의 인정을 저버리고 우리 가정의 300억이라는 큰 재산을 몰래 빼돌려 저희 가정을 완전히 풍비박산을 만든 사기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그 이야기 할라꼬 군대까지 전화를 했으예. 아부지 문제니 아부지가 알아서 하소."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솔직히 마음은 그리 달갑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의 탄원서로 그 사기꾼이 풀려났습니다. 가장 큰 관계의 장벽인 원수와의 장벽도 아버지가 믿은 그 복음의 능력 앞에서는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결정을 축복하셔서 그 원수 같은 사기꾼을 미워해서 왔던 아버지의 상처와 분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날마다 자살하겠다며 날마다 잠 못 이루고 괴로워하시던 그 아픔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사기꾼을 만나면 죽이겠다며 주머니에 칼을 품고 다니시던 그 분노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용서는 우리 안의 칼을 내려 놓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복음안에서 용서 받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용서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두가지 형태를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잘못한 자가 회개할 경우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이 말씀에서 분명히 상대가 회개하면 용서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온전한 용서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용서는 강요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자가 대부분은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이 강자일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자들에게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때 상처 받은 약자들이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잘못한 자가 회개하지 않을 경우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이 말씀 뿐 아니라 여러 말씀에서 일방적인 용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6:14, 골 3:13, 마 11:25, 눅 6:37, 마 18:35) 물론, 해석에 따라 조금 달리 이해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어떤 행위에 따라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고 그냥 용서하라 라고 분명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해주시는 데 우리는 왜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야 하나?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진정한 "회개"가 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의문이 풀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를 날마다 하고 있지만, 그것은 회개의 시작이지 온전한 회개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삶을 온전히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온전하지 않은 회개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회개도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회개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그 상대방의 회개와 상관없는 일방적인 은혜라고 여기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와 같은 은혜로 힘입어 상대방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가지 용서를 다 믿습니다. 첫번째의 경우이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대부분은 두번째 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는 강요가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용서를 통해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여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