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들어와 세계선교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사건(기도모임)이 일어났다. 미국에 해외선교의 불이 타오르게 했던 뉴잉글랜드 윌리암스대학에서 일어났던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이다. 이 기도회를 계기로 미국의 학생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복음이 활발히 전파되기 시작된다.
선교학자들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에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선교사들이 남미, 호주,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광활한 지역으로 나아갔다. 인도의 윌리엄 케리(1761-1834), 아프리카의 데이빗 리빙스톤(1813-1873), 중국의 허드슨 테일러(1832-1905), 버마의 아도람 저드슨(1788-1850) 같은 위대한 선교사들이 이 중에 포함된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오늘날 대대적인 영적 추수를 위해 미국과 세계 곳곳에 대 부흥이 일어나야 하고, 그 부흥은 특별히 대학가에서 일어나야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학가의 부흥을 사모하며 사무엘 밀즈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건초더미 기도운동을 소개하고싶다.
사무엘 밀즈 Jr.(Samuel Mills Jr. 1783-1818)
건초더미 기도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사무엘 밀즈는 예일대학 출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무엘 밀즈 목사는 커네티컷 주의 부흥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분이었고, 경건한 그의 어머니는 Mills가 어린시절에 Mills와 상의없이 그를 선교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바쳤다. 당시 미국교회가 인디언 선교는 하고 있었지만 해외선교에는 아직 관심이 없었고, 해외선교부 같은 선교기관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의 어머니의 아들 헌신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Mills 는 17세 때 부흥운동을 통해 큰 은혜를 체험하고 그 자신이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이 헌신 이후 세계선교는 평생 흔들림없는 그의 목표가 되었다. 23세가 되던 1806년에 예일이나 하바드 보다 등록금이 싼 윌리암스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는 윌리암스 마을과 대학 안에 영적 부흥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을 갖고 대학 안에서 복음과 부흥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Mills 와 그의 친구들(Mills 그룹이라고도 불렀다) 은 매주 정기적으로 모였고 정기모임 외에도 자주 따로 모여 학생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회를 가졌다.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
그러던 중 1808년 8월 어느 무더운 토요일 날 5명의 Mills 그룹 학생들이 Hoosic River 강변에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이 때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소나기가 쏟아지자 소나기와 천둥을 피해 근처에 있던 건초더미 속으로 피해 그곳에서 비가 그치기까지 아시아 선교에 대해서 나누며 뜨겁게 기도한다.
그 때 성령께서 그곳에 강하게 임하셨다. Mills 는 우리가 아무리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할 지라도 우리 자신들이 해외로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별 의미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We can do this, if we will !" 라고 도전했다. 이 구호는 이후 건초더미 기도운동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 기도모임은 그해 여름 내내 그 숲속에서 계속 되었고, 겨울이 다가오자 기도회 장소를 어느 부인의 집으로 옮겨 계속하다가 다시 숲속에서 1807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작은 기도모임이 미국의 대학에서 일어난 최초의 해외선교를 위한 기도회였다.
이처럼 선교에 헌신되고 기도하는 소수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펼쳐나가시게 된다. 필자는 오늘날 미국의 모든 대학에서 이처럼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모임들이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건초더미 기도회의 열매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언제라도 어디든지 가겠다고 다짐하고 북미주 최초의 해외 복음전파를 위한 결사대 같은 "The Society of Brethren"(형제회)를 조직한다. 그들 5명은 윌리암스대학을 졸업한 후에 주변 신학교와 예일, 프린스턴, 하바드대학으로 재입학해서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고 세계선교 헌신자들을 확보해 나가면서 선교 정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2, 그들이 1810년 6월에 열리고있던 교단 총회를 찾아가 자신들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해주기를 요청함으로 1810년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회가 탄생한다.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미국해외선교회)이 만들어진 2년 후에 그들 중 3명과 아도람 저드슨 등 5명을 인도로 파송한다. ABCFM(미국해외선교회) 를 통해서 이후 50년간 1250명의 선교사가 미국에서 해외로 파송되었다.
한편 인도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무엘 밀즈는 미국해외선교회의 요청으로 선교사로 안수받지 않고 대신 세계선교를 촉진하기 위해 미국에 남아 선교사 파송과 지원, 선교에 관한 정보제공과 선교사 후보생 교육, 미국의 오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
3, 사무엘 밀즈의 영향과 도전으로 1816년에 미국성서공회가 조직되어 국내와 해외에 많은 성경을 보급하게 된다.
사무엘 밀즈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도 하지않고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온 생애를 불태웠다. 그가 형제회(The Society of Breathren) 를 만들 때의 꿈 중의 하나는 대학간의 연합선교회를 결성하는 것이었는데 약 70년 헐몬산 수련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4, 기도회의 자리에 건초더미 기도회 기념비가 세워지고 이 기도운동은 학생자원선교운동(SVM)으로 연결된다.
건초더미 기도회 61년 후 1867년에 기도회 장소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도회를 기념하여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세계에 처음있는 일일 것이다. 1879년, 프린스톤대학 YMCA 지도책임자인 루터 위셔드는 윌리암스대학 YMCA 회장인 찰스 오버를 만나 건초더미기도회 기념비를 찾아갔다. 눈 덮힌 기념비 앞에 꿇어 앉아 자신들도 그들 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디든지, 언제든지, 어떤 일도 하겠습니다" 라고 헌신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집회를 인도하여 유명한 케임브리지 7인을 선교사로 헌신시킨 DL 무디를 강사로 모시고 헐몬산 대학생연합사경회를 준비한다. 루터 위샤드와 찰스 오버는 이를 위해 여러 대학을 찾아가 89개 대학에서 251명을 학생대표들을 이 사경회에 참석 시켰다. 헐몬산 대학생연합사경회에서 100명의 참가자들이 선교사 헌신을 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될 학생자원선교운동(SVM)이 태동하게된다.
또한 프린스턴 대학을 다니면서 사무엘 밀즈가 만든 형제회를 통해 헌신하여 인도선교사로 나갔던 와일더라는 선교사가 선교활동 중에 건강이 나빠져 미국으로 돌아와 프린스턴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들 로버트 와일더와 딸 그레이스 와일더가 헐몬산 대학생연합사경회 소식을 듣고 이번 대학생연합사경회를 통해 100명의 헌교헌신자가 나오도록 중보기도를 해왔고 사경회를주도적으로 섬긴다.
로버트 와일더는 그곳에서 존 모트(John Mott)를 만나 학생자원선교운동을 일으키고 이 운동이 북미와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 정착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학생자원선교운동을 통해 선교사로 헌신한 젊은이들이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주님, 오늘날 미국의 대학마다 사무엘 밀즈 같은 젊은이들을 세우셔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모임들이 불길 처럼 일어나게 하소서. 특별히 교회의 대학 청년부들과 대학생 전문선교단체들 안에서 부흥을 위한 기도가 타오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시 한번 이 땅에 학생자원선교운동 같은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주님의 지상명령이 힘있게 성취되게 하소서.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목사(JAM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