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제재와 인권: '사람사는 세상', 그리고 '사람이 먼저다'에서의 인권
'사람사는 세상', 그리고 '사람이 먼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각기 대표하는 말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인권'을 중시한다는 의미를 담은 듯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정치 지도자가 받드는 인권이라는 가치가 현재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온전하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회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두 사람을 비롯해 현 진보 계열 집권층 전체가 추종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편협한 시각으로 인간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20세기 비교신화학 대표자로 인정받는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올바르게 밝힌 바 있듯, 인간의 실존적 본질 가운데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신 혹은 그와 유사한 무한자를 향한 인간 존재의 초월을 열망한다.
이런 열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인 영혼의 소망의 발로인지, 아니면 생태적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력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며 나온 환상적 욕망인지, 이 물음에 관해서는 여전히 학문적인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다만 인간에게 초월의 열망과 소망이 있고, 이로부터 각종 제도종교뿐 아니라 유사종교적 행태가 나온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권' 개념은 '종교의 자유'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 인간의 행복추구권 가운데는 신앙의 소망과 위안을 통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헌법적 사고는 인간이 단지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만족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자, 초월의 소망까지 충족돼야 비로소 사람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자라는 전인적 인간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현 정권 지도부의 발언과 정책 판단을 살펴보면, 이런 전인적 인간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나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상에서 파생된 유물론적-무신론적 인간이해를 계승하고 추종하는 이들에게서 당연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 지도부가 명명한바 '중국 바이러스(Chinese Virus)'가 우한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 퍼져나가는 가운데서도, 현 정권 지도부는 전염병 확산을 위해 가장 필요한 조치였던 중국인 입국 제한 혹은 금지를 시행하지 않았다.
이 실책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전염병 피해를 최소 규모로 막을 수 있었던 '골든 타임'을 놓친 채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손실과 안타까운 인명 손실을 감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유독 현 정권과 언론이 전염병 확산의 주 원인으로 지목하고서 집중적으로 압박을 가한 곳은 다름이 아닌 교회와 예배당이었다.
예배의 신앙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개신교회들은 이런 편향된 태도에 가장 큰 압박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는데 급급했던 신흥종교 신천지의 부조리한 행각 또한 크게 일조했다. 신천지의 비행(非行)은 현 정권이 기독교회들을 압박하는 데 확고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런 상황 전체는 현 진보 계열 사회주의 정권이 인권을 규정할 때 주로 사람의 질료적 측면을 보장하고 만족시키는 데서만 의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을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육체의 만족이나 재리(財利)와 상관없이 초월의 소망을 따르는 예배 행위가 실제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미신적인 행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배 제재와 정의: 초월이 결여된 정의의 해소 불가능한 편향성과 아이러니
하지만 먼저 유념해야 할 사실은 교회들이 예배 중 감염의 위험성을 결코 방치하고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요 언론들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과 달리, 교회들은 지금까지 가능한 방책을 모두 동원하며 중국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 시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해 왔다.
대형교회들은 온라인 예배를 시행했고, 중소형 교회들도 각기 방역과 위생에 많은 힘을 들였다. 한국교회 전체가 주요 관공서들과 비등한 수준으로, 그리고 시중의 일반 사업장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적극적인 방역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는 교회가 당연히 맡아야 할 사회적 책임을 담당하는 동시에 새로운 신자들의 방문을 좌절시키지 않으려는 절박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유독 신앙 공동체들, 특히 교회들에게 전염병 확산의 책임을 돌리려 하는 처사는 인권 수호 차원에서 정당하지도 않고 형평성에 맞지도 않다.
이것이 실은 중국으로부터 바이러스 유입을 막지 않은 정책 지도자들의 오판과 실책을 감추기 위한 책임회피 방편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교회들은 현재 당면한 중국 코로나 창궐기 중 예배 문제도 우려스럽지만, 그 이후의 상황 역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단순히 예배 중단으로 인한 공동체 활동의 위축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라, 향후 사회주의 사상에 편향된 정책결정자들에 의해 신앙인들의 자유로운 신앙 활동과 인권이 침해당하는 사례가 일상화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현 정권이 진정 인권을 보호하고 공익을 추구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중국으로부터의 바이러스 유입을 막고, 교회보다 전염병 확산 가능성이 높은 사업장들부터 관리하고 제재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 휘하 현 정권 지도부가 시행해 온 대응 실태를 보면, 이처럼 실효성 있는 정책적 태도를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한국 신앙인들은 초월과 신앙에 대한 가치 인식이 부족한 정치인들이 정권을 획득했을 때 겪게 되는 난맥상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 만큼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의 말이 우리의 마음에 큰 공명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행위)이 허용된다(everything is permitted)."
이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네 형제들 가운데 무신론자인 이반 카라마조프가 신조처럼 선언한 말이다.
이반은 이 말이 인간을 신 혹은 종교라는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선언이라 생각했지만, 작품 전체로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말을 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인간, 초월의 가치를 잘 모르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과오(過誤)의 무제한성을 지적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확인된다.
진보 계열 사회주의 정권들이 공통적으로 부르짖는 모토는 이 땅에서 사람을 위한 참된 정의와 인권을 지켜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르짖음은 해소 불가능한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시하는 인간의 초월성, 인간의 신-정향성(God-orientedness)이 실은 인류에게 있어서 진정한 정의의 기반이자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