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발 우한 폐렴, 일명 코로나 폐렴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온 세계가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 누가 그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지 몰라서 혹시나 옮길 까 봐 서로를 의심한다. 정부는 여러 가지 우한 폐렴에 걸리지 않을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라', '손을 20초 이상 자주 씻으라', '마스크를 쓰고 다니라'등으로 예방 홍보를 하고 있다.
정부에 이런 발표에 발맞추어 사람들은 우한 폐렴의 공포를 실감나게 하듯이 물건들을 사재기를 하여 코스코를 비롯하여 여러 도소매상의 물건이 바닥을 보이고 있고 마스크를 구입하려고 해도 살 수가 없으며 홈디포의 일반 마스크도 동이 낫다고 한다. 회사들도 앞을 다투어 자택 근무를 종용하고 기침이나 열이 있으면 회사에 오지 말고 증상이 악화되면 질병관리본부로 연락하여 검사를 받으라고 한다.
이 상황을 더 무섭게 만드는 것이 다름이 아닌 교회마저도 공동예배를 거르고 인터넷을 통한 예배로 바꾸고 온라인 헌금 계좌를 열어 교회 수입의 누수도 막는 현대문명을 이용한 대체방안으로 이 공포에 대응하려고 한다. 하지만 교회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목사의 한 사람으로 과연 쉽게 결정할 문제인가? 온당한 교회의 처사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가 분명히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전략 중 하나로 판단된다면 앞으로는 이보다 더 악한 질병이 만연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 우한 폐렴은 시작의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이제 교회라는 공동체의 모임은 사라질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분별한 거짓 진리가 인터넷상에 만연하여 성도들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적그리스도가 장악한 정부로 인하여 교회의 온라인 사이트들을 차단하면 성도는 더 이상 복음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중국과 한국을 통해 정부가 자기의 뜻과 맞지 않는 유튜버들을 막고 노란 딱지를 붙여서 방송을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는가?
더 무서운 것은 성도가 이 온라인의 예배에 익숙해지면 교회에서의 예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들이 우리의 공동체 예배를 우한 폐렴이라는 아주 소소한 질병으로 인하여 스스로 성도들의 모임을 흩뜨려 버리는 일을 먼저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본다.
조선의 기독교가 일본의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 어떤 구실로 모든 교회가 신사 참배의 길을 열었는가? 이들이 내놓은 지혜가 이와 같았다. "우리가 신사 참배를 거절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교회는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우리의 중심에는 예수를 믿고 겉으로는 신사에게 절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될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아니신가?"라는 설득이었다. 그들의 지혜로운 결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고 교회가 문을 닫는 일이 없이 예배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신사라는 우상에 참배하는 교회의 이중성이 생겼다. 그때는 많은 신자들로부터 합리적인 목사들의 선동이 옳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해방이 되고 북한에는 공산당이 차지하더니 북한의 교회는 무너지고 그 위에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지금까지 있지 않은가?
이것을 우리의 역사적 거울로 우리의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그 순결한 성도들이 그렇게 기독교가 번창해 나갈 때 네로에 의해서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고, 개들의 밥이 되고, 검투사의 노리개가 되었으며, 장작 더미 위에 횃불이 되어 처참히 죽어 가야 했나? 왜 하나님은 그들을 아주 편하게 로마의 황제들보다 더 영광스러운 옷을 입혀 "나를 믿는 자들은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오늘의 이 사태를 보니 이제야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우리는 성경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주님 오시기 전까지의 이 세상은 성도들에게 수많은 환난과 배교가 있을 것이며 이 환난을 통해 성도의 가치관이 이 땅이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저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그 아름답고 순결한 그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후세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사자의 밥이 되고, 횃불이 되어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여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성도들에게 베드로서를 쓰면서, 이 환난을 피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당당하게 그 환난 속으로 들어가는 거룩한 제물이 되고, 약속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주 앞에서 점과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믿음을 지키기를 당부한 것이다.
요즈음 나는 나의 아버지가 매우 보고 싶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1948년 5월에 월남하셨다. 신앙을 가졌던 아버지는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북한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어머니와 갓난아이를 데리고 함경남도에서 황해도로 와서 배를 타고 서울로 오셨다.
오셔서 서북청년단의 살림을 맡으면서 공산당들과 싸우셨다. 그러던 중에 6.25를 맞아 피난을 떠났다. 피난길에 남의 무 밭이며 감자 밭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전쟁 통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 하고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 어느 것 하나 손대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때 서울에서 난 2살배기 아이와 함께 있었다. 어른들은 배고픔을 참을 수 있으나 2살 가령의 아이는 굶주림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더욱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탈북을 할 때 어린 여아를 잃은 경험이 있었다. 이제 그 아이가 배고파하는데 잃어버린 그 여아가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기를 더 소원하셨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 먹고 7일을 걸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들 방에 들어 탈진을 한 것이다. 8월의 장렬한 태양 아래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8월의 따가운 햇볕 아래 갈라진 논바닥에 살아있는 물고기 버둥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 물고기를 주셨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끊여 먹고 전라도 정읍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만약 저라면 그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였을까? 어느 동기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무를 뽑아 먹고 감자를 뽑아 먹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자식을 살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냐? 고. 참 현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무지했다. 자식의 굶주림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짓는 것이 더 두려우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신앙을 분명히 오늘날 우리가 따라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본질만 안 변한다면 시대에 따라 신앙과 상황과 환경에 따라 믿는 방식이 바뀌어도 된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변질인지 묻고 싶다.
평신도이신 아버지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당당하게 사람의 생각을 넘어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는데 목사인 나는 우한 폐렴에 떨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럽다.
사랑하는 거룩한 성도들이여!
우한 폐렴을 두려워하지 말고 교회에 모이기를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폐렴에 걸리면 그것은 순교이며, 하나님께 바르게 드리는 예배에 우한 폐렴을 걸리게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반문할지는 몰라도 피할 거 다 피하다가 폐렴에 걸리는 것 또한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위한 믿음의 선조들의 거룩한 순교의 대열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줄이고 활동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교회의 예배로, 교회의 활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환난이 올 때 우리의 후세들은 우리의 담대한 행동을 보고 우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보고 배울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제 아버지가 너무도 보고 싶습니다. 평신도이신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실 수 있었느냐고 또한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