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의 청교도들, 즉 퓨리탄(Puritans) 또는 까다로운 자들(Precisians)
영국 왕 <헨리 8세>는 부인인 <캐더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혼을 하려고 교황인 <줄리우스 2세>에게 허락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1534년에 의회의 동의를 얻어서,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발표했다. 이것은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은 더 이상 교황이 아니라 <헨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영국의 교회는 영국 왕의 지시와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교황을 지지하는 자는 모두 처형되었다.
<헨리 왕>은 수도원과 종교 기관을 폐지하고, 그 재산을 영주나 귀족들에게 판매하였다. 즉 종교 기관들이 평신도들의 관리 아래에 놓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비록 로마의 간섭을 배제하고 라틴어가 아닌 영어 성경이 영국 내 전국 교회에 비치되는 것까지는 허락되었으나, 영국 내에서 교회를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되지 않았다. 성경 번역자인 <윌리엄 틴데일>은 화형 당했으며, <존 후퍼> 등의 개혁자들은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피신해야했다.
<헨리 8세>가 죽고 8세의 어린 아이 <에드워드 6세>가 왕이 되었다. 외삼촌 <벌레이 경>이 섭정을 하면서,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와 함께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 <칼빈>과 <멜랑히톤> 등의 영향을 통하여, 영국의 교회는 개혁의 물결을 타는 듯이 보였다. 일부 불만들이 있었으나, 1549년에 출판된 <공동 기도서>에는 종교 개혁 사상이 분명히 나타났으며, 교회에서 성화가 사라지는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헨리 8세 때에 외국으로 피신했던 <존 후퍼>는 귀국하여, 성직자의 복장을 로마의 잔재로 비판하는 이른바 <복장 논쟁>으로 개혁에 힘을 보탰다.
<에드워드 6세>가 결핵으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죽자, 이어서 유명한(?) <피의 메리>(Bloody Mary)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며 반동종교개혁을 후원하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다. 아니나 다를까 <메리>는 종교개혁 운동을 쓸어내고 로마 카톨릭을 복구하려고, 반대하는 자들은 누구나 사정없이 "피 튀기게" 처형하였다. 종교 개혁자 300명이 "Bloody" Mary에 의해 스미스필드에서 처형되었고 800명의 개혁자들은 대륙으로 피신하였다. 처형장에서의 <휴 라티머>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찌른다.
"리들리 경, 담대하시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을 양초가 되어 불타게 될 것입니다."
<피의 메리>가 1558년에 죽자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왕이 되었다. 로마 카톨릭과 종교 개혁자들 사이의 갈등을 보아온 <엘리자베스>는 종교적으로 중용정책을 폈으나, <헨리 8세>가 수도원과 종교 기관을 해체하여 영주나 귀족들에게 팔아버린 후로 십일조나 헌금이 부족하자, 영주들이 가진 교권을 감독에게로 돌리고자 하였다. 당연히 이것은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귀족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편을 들게 되었다.
상황이 종교 개혁자들에게 유리하게 변했다. <피의 메리> 치하에서 대륙으로 피신했던 800명의 개혁자들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스위스의 취리히, 바젤, 제네바 등지에서 피난민 교회를 세우고 목사로 활동했으며, <존 칼빈>이나 <하인리히 불링거>등의 개혁자들과 교제하며 개혁 사상을 뼛속 깊숙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위와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 도전하는, 신약 성경을 원어로 배워서, 신약 성경에 나타난대로 예배를 세우고, 생활에 적용하고자 깐깐하게 따지고 까다롭게 구는 "까다로운 자들"(Precisians)이었다. 이들 까다로운 자들이 귀국하면서 "청교도(Puritans)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장로교 국가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
1528년 <패트릭 해밀턴>이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정문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지고, 위대한 개혁자요 전사인 <존 후스>도 1572년에 사망했다. 이어서 <앤드류 멜빌>이 왕 <제임스 1세>에게 도전하며 개혁을 이끌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의 길은 멀었다.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진 아버지 <제임스 1세>에 이어 왕이 된 <찰스 1세>는 아버지보다 더 전제군주적인 정책을 펼쳤다. 장로정치를 부인하고, 대주교를 세우고, 성공회적인 교회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1637년 7월 23일 에딘버러의 자일스 교회에서 성공회 의식으로 예배를 드리려는 찰나였다. 장로교가 서기도 전에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달랐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의 거센 항의는 성공회 예배를 무산시켰고, 이를 발단으로 <찰스 1세>에 대한 저항이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듬해에는 장로교도들이 에든버러의 그레이 프라이어 교회에 모여서, <국가계약>을 맺었다. 이들을 <언약도>(Covenanters)라고 부른다. 장로교도들은 <찰스 1세>의 정치적 종교적 학정에 대항하여, 장로교회와 장로정치와 장로교 예배를 모든 것을 바쳐서 지키기로 언약-결의하였다. 이것은 왕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찰스>는 당시에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함께 다스리는 왕이었다. 왕이 스코틀랜드와 싸우려하였으나,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이 장로교도들과 함께 왕에 대항하였다. 포악한 전제군주 <찰스>도 결국 죽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올리버 크롬웰>은 성공회도 장로교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립주의를 지지하여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크롬웰>도 죽었다.
<크롬웰>로 인하여 수면 위로 떠오른 앵글로 색슨족과 스코트족 사이의 깊은 민족적 감정 때문에 스코틀랜드인들은 1660년 <찰스 2세>를 귀국시키고, 그를 왕위에 앉히고, <국가계약>에 서명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실수요 경솔함이었다. <찰스 2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국가 계약>을 버리고 성공회를 지지하고 장로교를 억압하였다. <찰스 2세>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장로교도들은 <국가계약>을 다시 확인하고 <찰스 2세>에 결사항전을 개시하였다. <계약파> 또는 <언약도>라 불리는 그들 대부분은 죽임을 당했다. 최대의 위기요, 마지막 고비였다.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를 이어서 메리와 윌리엄 공이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며,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를 회복시켰다. 마침내 1707년 5월 1일부터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 국가가 되었다.(영국은 감독주의 국가가 되었다.)
*참고 문헌
1. 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2)
2. 김의환, 김의환 전집 1 기독교회사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2008)
3. 오덕교, 종교개혁사 (서울,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