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즐겨 따르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품성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은혜를 '성령의 열매'(Fruit of Holy Spirit)라고 한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5장을 통해 이 은혜의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성령으로 지속적으로 걸어가면(περιπατειτε), 육체의 욕망을 단 한번도 채우지 않는다(τελεσητε)(16절).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일이 어떻게 범죄를 근절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γαρ) 육체는 성령을 대항하여 욕구하고 있고, 성령은 또한 육체를 대항하여 욕구하고 있기 때문이다(17절).
언제라도, 그리고 아무리 거룩함의 완전을 이룬 자라 할지라도 경험상 육체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져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런 단계는 결코 없다. 다만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진압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대항하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였다'(롬 6:6; 갈 5:24)는 표현은 성결 능력의 근본적 현주소를 정확히 기술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이럴 때는 '죄를 죽이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영혼 속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살던 옛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할 때 우리는 이 성결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성결의 체험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한다. 즉 만일 우리의 자유의지가 거듭난 이후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만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죄악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옛사람의 죽음은 현재완료형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헌신에 대한 약속에 있어서 우리의 불성실이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결의 능력이 완전한 '죄의 멸절'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경험되는 것이다. 육체의 욕망은 우리 안에 여전히 있다. 그것은 언제나 성령의 소욕을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가 지속성 있게 드려진다면, 죄와 육체의 소욕 그리고 율법의 요구는(18절) 우리 안에서 죽은 것과 같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우선 육체의 일은 매우 현저하게 분별할 수 있다. 도대체 육체의 일인지 성령의 일인지를 분간 못해서 죄 짓는 일이 없을 정도다. 그 분별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십계명을 통해서, 상식을 통해서, 복음의 정신을 통해서 명확히 확인된다. 다만 지나친 자기 합리화만이 육체의 일을 애써 정당화하고자 애쓸 뿐이다.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21절) 더 이상의 목록을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것이 육체의 일인지 알 수 있다. 죄의 목록은 시대를 따라서 늘어난다. 현대에 새롭게 늘어나는 죄악들은 물론 성경에 그 언급조차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양심을 통해 여실히 알게 된다.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는(현재분사)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21절). 이 표현은 미래적으로 되어 있으나, 앞의 현재분사와 같은 시제이기 때문에 현재형으로 해석 되야 한다. 그러기에 이런 일을 행한 자들은 앞으로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 이런 일들은 현저히 육체에 속한 것들이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하고 있는 동안에 동시에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는 성격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