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심겨져 있는 고통의 기억은 리스본 대지진입니다. 1755년 11월 1일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 아침 9시 30분이었습니다.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이라 평소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8.7도 내외의 강진과 함께 5분 동안의 격한 진동은 포르투칼의 수도 리스본의 85%에 해당하는 10,000채 이상의 건물을 무너뜨렸고 20만의 인구 중에서 30,000-40,000명의 사람들이 지진과 그 후유증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지진으로 발생한 건물의 붕괴와 화재로 어수선한 가운데, 놀란 사람들은 건물이 없는 강가와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곧 30미터 이상의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타구스(Tagus) 강의 강물이 현저하게 줄어 바닥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무시무시한 해일이 몰려와 리스본 강가와 시내에 있는 부상자들과 시신은 다시 한 번 물에 잠겼습니다. 두 번의 쓰나미가 다시 덮치며, 궁궐, 도서관, 저택, 교회는 완파되었고, 그 주변의 도시뿐 아니라 모로코에서도 10,000명 이상이 죽는 재난이 되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인간의 악으로 일어나는 고난이야 사람의 악함 때문이라지만, 거룩한 날의 예배와 축제와 함께 신자들이 재난과 죽음을 맞이함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악과 재앙을 "선의 부재"(不在)라고 말하기에 그것은 너무도 비참하고 두려웠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는 18세기의 리스본 대지진은 20세기의 홀로코스트처럼 사람의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했습니다. 철학자인 볼테르, 칸트, 루소, 괴테는 "하나님이 주신 최선의 지구"라는 생각을 지속해야 하는가 반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변증하려던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입지를 점차 잃게 되었습니다. 악의 문제는 심각하게 재고되었고,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 악과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악에 대한 해결책을 가져서가 아니라, 악과 고통을 감당하는 정도가 그 사람의 성숙의 정도라고 보면 크게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외치지만, 고난의 당사자인 욥은 "내가 벗은 몸으로 왔으니 벗은 몸으로 가리라"고 반응합니다. 악이란 지성으로 답하기 힘든 난제지만, 오직 영성적 소화와 이해로 대응하는 성숙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악은 물론 물리쳐야 할 시험거리입니다. 그러나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있을 때, 우리는 누구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희생양을 만드는 것에 앞서서, 먼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고난을 나누어가질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최고의 위로는 같이 애통하고 같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난당한 사람과 함께 슬퍼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악의 존재를 허용하나 그 것을 이용하시고 그 것을 넘어서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