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깨지고 갈라져서 쓸모없게 된 질그릇 같은 사람을 부르신다고 말했습니다. "소명을 받을 때 우리의 상황은 주로 어떤 상황이냐? 하나님은 모든 바지랑대를 다 치워 버린다. 대화할 친구도 없고, 받을 전화도 없고, 참석할 모임도 없고, 감상할 책도 없고, 오로지 벌거벗고, 취약하고, 죄악되고, 가난하고, 상한 심령만 끌어안고 있는 처절한 모습만이 남는다." 바지랑대란 옛날에 긴 빨랫줄을 받쳐 놓던 장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에는 그 바지랑대를 다 치워 버려서 내가 기댈 언덕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상처받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고, 철저히 무너지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울산의 어느 목회자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부임했을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분오열된 교회, 교인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교회, 법정 시비가 있었던 교회, 너무나 싸워서 이웃사람들에게 똥물 세례까지 받았던 교회, 빚이 3억 이상 있었던 교회, 주변에 교회는 하나도 없고 무당과 유명한 보살만 100여 명 있는 동네, 모든 선배 목사들이 포기하자고 했던 교회, 노회에서조차 처분하려고 하였던 교회, 교회를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결과 교회에 불이 나서 교회 건물도 제대로 없고 폐물 창고처럼 되어 마리화나나 본드 흡연의 중심 장소가 되어 버린 무법지대의 온상, 게다가 주변 이웃들이 관할 구청에 진정을 내서 철거 권고를 받고 있었던 교회, 울산 토박이가 가장 많은 오래된 지역... 이렇게 숨 막히는 조건에 목회 초년생이었던 자신은 절망적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건강 면에서도 곧 깨질 것만 같은 질그릇이었고, 심리적인 면에서도 늘 고민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영적인 면에서도 한 순간만 방심하면 교만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언제 깨질 지 모르는 연약한 질그릇이요, 값싼 질그릇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내가 이렇게 연약하고 보잘 것 없을 때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더라는 사실입니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도 헌신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 낙심하지 않게 되었노라고 간증합니다(고후4장). 그 전까지는 사역하면서 낙심하는 일이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너무 힘들다고 선교지에서 갑자기 돌아간 마가를 보면서 낙심했을 것이고, 이 세상을 사랑해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데마를 보면서도 낙심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해도 실패했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전하지 않겠다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내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아직 덜 깨진 자아가 우리의 문제 아닐까요? 깨지고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다윗은 얘기합니다(시편51:17).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절호의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