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앞으로 통일을 대비하여 비핵화 과제도 있지만 북한을 다원화 사회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정치적 양당제, 다당제 등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으나, 다원화 사회로 들어가는 첫 번째 입구는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일시대 지도자를 양성을 위해 올해 신설된 숭실대통일아카데미(원장 조요셉 초빙교수) 초청강사로 나선 태영호 전 공사는 26일 저녁 숭실대 형남공학관에서 열린 오픈강의에서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만일 우리가 (북한에) 교회당을 한 개라도 더 건설하고 기독교의 자유를 조금씩 허용해나간다면 북한을 다원화된 사회로 만들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히 쉽게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태영호 전 공사가 26일 숭실대통일아카데미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지희 기자 |
'북한의 종교정책과 정치구조, 핵전략과 하노이회담 결과'에 대해 100분 가까이 강의한 태 전 공사는 한국교회가 알지 못하거나, 불분명하게 알고 있는 북한의 기독교 탄압정책, 현 종교정책과 정치구조의 상호관계를 비롯해 북한의 핵보유 전략과 최근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한국에 온 지 2년 반이 된 태 전 공사는 강의에 앞서 "평균 한 달에 교회 강연을 3~4곳을 가는데, 교회에 갈 때마다 목사님들이 성경책을 주며 꼭 읽어보라고 하셔서 읽어본다"며 "제게는 아직 성경이 대단히 힘들다. 북한에서 쓰지 않는 말도 너무 많아 핸드폰으로 찾아보면서 읽는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는 대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며 성경 읽는 것이 힘들다고 했더니 한 학생이 '하룻밤에 읽는 만화 성경'을 가져와 새벽 3시까지 신구약을 다 읽었다. 만화책을 읽으며 많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강의 중에는 "북한에서 한국에 오기 전까지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배웠기 때문에 성경책을 읽어봐도 아직까지도 내가 교인이다 할 수 없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안 가게 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태영호 전 공사는 이날 북한의 기독교 탄압정책과 최근 일어나는 움직임에 대해 언급했다. 북한이 처음으로 작년 성탄절 때 당국이 직접 제작한 성탄 영상을 우리나라 개신교와 가톨릭 공동단체에 보내온 데 대해 "북한이 지금에서야 이 영상을 보내는 등 의도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는, 항상 근저에 내부 사정이 상당히 어려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북한은 사정이 어려워지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한 첫 번째 출구로 교인들의 마음부터 사려고 한다. 그러나 사정이 좋아지면 금방 (이 일을) 하지 않는 패턴이 있음을 사전에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태영호 전 공사는 작년 북한 당국이 직접 성탄 영상을 제작해 보내온 것에 대해 "북한이 의도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는, 항상 근저에 내부 사정이 상당히 어려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북한은 사정이 어려워지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한 첫 번째 출구로 교인들의 마음부터 사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지희 기자 |
태 전 공사는 또 공산국가들은 종교를 '탄압'했다면, 북한은 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펴 왔음을 비판했다. 그는 "북한은 종교의 힘을 알고 있으며 정치구조, 운용방식 등을 기독교에서 많이 벤치마킹해 왔다"며 "기독교를 북한에서 말살해야 인간인 김일성이 하늘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으므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종교 말살 정책을 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종교 탄압은 법률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고 교회당과 목사 등 종교 구조는 그대로 두지만 종교의 정상적 전파, 확대는 억제하고 간섭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종교 말살은 교회당 자체를 다 허물어버리고 목사들은 처형하거나 내쫓아 물리적으로 종교 자체를 없애버린다. 북한은 6.25 전쟁 이후 교회당을 모두 허물었고, 1970년대 말에는 김일성이 북한에서 종교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선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돌연 북한이 1988년 봉수교회당을 건설한 것에 대해 그는 "항상 북한은 위기감을 느낄 때 먼저 종교로 다가간다"며 "88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열리자 북한은 89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준비하며 정상국가라면 있어야 할 교회당을 보여주기 위해 급히 봉수교회를 건설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뒤엎는 적화통일전략을 가진 북한이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종교세력이 부상하자 종교말살정책을 감추고 이들의 지지와 인도주의 지원을 받기 위해 봉수교회를 세웠다고 말했다.
▲봉수교회의 첫 예배당(좌)은 2005년 9월 철거하고 한국 교단의 지원을 받아 새 예배당(우)을 2008년 헌당했다. 북한은 기존 봉수교회와 달리 새 교회당은 정면에서만 십자가가 보이도록 지었다. ⓒ숭실대통일아카데미 |
태 전 공사는 "종교 말살, 탄압은 미국이 꾸며낸 것으로 책임을 돌리기 위해 북한은 평양 등 큰 도시에 열 개의 교회를 지으려 했다. 그러나 봉수교회, 칠골교회 두 개를 짓고 멈췄다"며 "봉수교회를 시범적으로 지으며 과도기로 정하고, 북한 당국이 교회당의 통제가 가능한가를 먼저 시험했는데 종교의 힘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광복 이후 당시 20~25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보고, 분명 이전 신자가 있을 것으로 봤다. 국가 보위부가 잠복하여 보니 일요일 예배 시간만 되면 교회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나이 든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며 "그 중에서 몇 사람을 잡아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하고 솔직히 말하라고 하니 '아직 하나님을 믿는다'고 시인했고, 봉수교회도 김일성이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어서 하나님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었다. 봉수교회는 남한 적화통일에 종교단체를 이용하기 위해 설립됐지만, 가짜 교인으로 투입된 북한 사람들이 변화되면서 북한 당국은 종교의 힘을 다시 한번 인식했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에 있는 외국인들이 일요일마다 개신교 신자는 봉수교회에, 가톨릭 신자는 장충성당에 가는데, 북한 교인을 보여주기 위해 주체사상이 투철한 부인들로 가짜 교인들을 선발해 참석하게 했다"며 "일요일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도로 닦기, 청소 등을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데 여성들이 누가 나올까 하여 당에서 파견한 목사가 출석부를 만들었는데, 몇 달 뒤엔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미리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고, 성경책 내용을 들으며 마음도 치유받고, 모였다 헤어지는데 일반적인 정치행사가 아닌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일만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그래서 북한은 종교정책을 잘못 펴다 북한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자랄 수 있음을 인식했다"고 말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