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는 인문학에 정통해야 한다
설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다. 설교자는 동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흐름을 읽어야 설교자가 시대의 문제와 아픔 그리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도록 해주는 것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학문이다. 인문학이다.
동시대를 읽으며 살아가야 하는 설교자는 세상과 떨어져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설교하는 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사역 터전이 삶의 한복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정확하게 읽도록 해주는 인문학과 친구처럼 살아가야 한다.
설교는 삶이다. 설교가 삶이라는 것은 설교는 삶과 연결된 적용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적용을 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청중이다. 둘째, 세상이다.
이는 설교는 청중의 마음과 청중의 삶의 정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중을 알게 하는 것, 세상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인문학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
청중과 연결되는 설교, 세상을 꿰뚫는 설교를 하려면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 아니 인문학에 정통해야 한다.
설교자는 사람을 읽는 심리학,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하는 철학, 세상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사회학, 지금의 시점을 과거와 미래로 연결하도록 하는 역사학 등에 조예가 깊어야 한다.
인문학에 깊이와 넓이를 갖추려면, 인문학 분야의 공부의 양을 대폭 늘려야 한다. 굳이 비율을 매긴다면 신학 60%에 인문학 40%를 비율로 공부해야 한다. 현실은 인문학이 10%도 되지 않는다.
세상은 어디쯤인가?
지금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다. 즉 스마트폰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시대다. 그 결과 시대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전에는 60대가 시대를 주도했다면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30대가 주도한다. 60대는 '포노 사피엔스' 시대를 따라가기조차 벅찬 세대가 되었다.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던 1980년 후반 때는 인터넷 초기 단계였다. 지금은 4G를 지나 5G시대로 접어들었다. 5G와 함께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정보통신 기술의 시대가 되었다.
책 《포노 사피엔스》를 쓴 성균관대 교수인 최재봉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는 스마트폰이 '뇌'이고 '손'인 시대라고 말한다.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인류이기 때문이다.
포노 사피엔스는 영국의 경제주관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 부른 데서 유래됐다.
세상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문명의 교체시기, 표준 문명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이 아닌 플랫폼 회사의 대세다.
플랫폼 회사인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한 뒤 불과 6년 만에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1위 기업이 되었다. 세계 10대 기업 중 무려 8개인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과 세계 10대 기업에 속한 아시아의 1, 2위 기업인 알리바마와 텐센트도 플랫폼 기업이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우버, 에어비앤비, 네이버, 다음, 유튜버 등도 플랫폼 기업이다.
설교는 세상 읽기로부터 시작한다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는 교회도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도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요리하는 법이 달라져야 한다.
어릴 적 먹던 음식과 지금 먹는 음식이 다르다. 어른들과 선호하는 음식과 아이들이 선호하는 음식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전에 요리한 설교와 지금 설교 요리가 달라야 한다.
만약 이전의 요리법으로 계속 설교한다면, 청중은 귀를 막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설교는 시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가장 잘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적용이다. 전에는 적용이 당위성으로 하거나 교훈적으로 했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하면 청중은 부담만 백배가 될 뿐이다.
시대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 설교자가 적용을 잘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시대의 흐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시대를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청중은 설교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 들어도 실망만 안고 예배당을 나서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가나안 교인'이 왜 점점 많아지고 있는가? 설교자의 의식이 시대가 바뀐 것을 읽기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시대를 읽지 못하면 설교자만 은혜를 받는 설교만 난무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뀐 세상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적용을 해야 한다.
세상과 교회의 인문학 열풍?
세상은 인문학 열풍이 한풀 꺾였다. 안타까운 것이 설교자들은 이제 인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필자가 10년 전 독서하기 시작할 때 이미 인문학 열풍의 한복판에 있었다.
나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라는 책을 써놓고 출간을 미뤘다. 설교자들이 받아들일 때가 되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2018년 한재욱 목사의 책 《인문학을 하나님께》가 출간된 뒤 폭발적인 반응을 보고 용기를 얻어 출간을 의뢰했다.
그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설교자들 대상으로 인문학을 이야기하면 '인본주의 아니냐'는 말을 들었었다.
이는 설교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설교에서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트설교연구원(https://cafe.naver.com/judam11)을 통해 설교 글쓰기 세미나를 시작했던 10년 전에는 설교자들인 나를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봤다. 그러나 《설교는 글쓰기다》를 출간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늦은 감이 크다.
2018년부터 인문학에 대한 반응이 크다는 풍향계를 체감하고 있다. 최근 한 지방 도시에서 '설교에 인문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그때 강의가 끝난 뒤 질문이 그칠 줄 몰랐다. 식사 시간이 넘었음에도 모든 질문을 받지 못해 강제로(?) 마무리했다. 당시 세미나를 주최했던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30여회 세미나 중에서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는 설교자들이 인문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설교와 인문학'에 대한 강의 요청이 많아지고 있다.
설교자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세상보다 10년 쯤 뒤떨어진 것 같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세상을 공략하기 위한 인문학의 관심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김도인 목사. |
인문학은 세상의 흐름을 읽는 창구다
설교에서는 '내용'이 중요하다. 설교에서 내용만큼 중요한 것이 '삶'으로 연결하는 '적용'이다.
적용을 하려면 시대를 알아야 한다. 청중을 알아야 한다. 이는 설교는 시대와 무관할 수 없고 사람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용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을 살고 사람들에게 한다. 청중이 설교를 들은 뒤 '지금'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청중이 '지금' 들은 말씀을 삶으로 살아낼 때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를 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삶은 '과거'나 '내일'이 아니라 '지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자병법》에 '응형무궁(應形無窮)'이란 말이 나온다. "쉼 없이 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업은 '응형무궁'이란 사자성어를 품고 경영을 한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나아가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앞서가야 한다. 아니 앞서갈 수 없다면 발은 맞춰야 한다.
설교자는 인문학에 정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되 많이 해야 한다. 이는 인문학은 설교자가 세상의 흐름을 읽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세상 사조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청중을 길러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지금' 세상에 드러나는 설교를 할 수 있다.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저서로 《설교는 인문학이다/ 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 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 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 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자녁에는 축제로/ 좋은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