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욤'과 '라키아'의 현대적 해석을 중심으로
Ⅰ. 서론
오늘날 기독교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창조론이 현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갈등하고, 논쟁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한다. 이 문제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창세기의 서술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창조자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믿는 현대 기독교인들조차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읽을 때, 믿을 수 없는 모순적 서술들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창세기가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면, 창세기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읽고 있는 문헌의 배경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창세기는 BC. 약 1,500년경에 고대 히브리인 지도자 모세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문헌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자국어로 번역된 창세기를 읽고 있다. 번역서에는 항상 번역자에 의한 오역과 왜곡된 서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번역된 창세기를 읽는 현대인들에게 모순적인 서술이 발견되는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 창세기를 읽으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모든 문헌에 대한 해석은 저자가 서술할 당시에 사용했던 문자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저자의 서술은 그의 경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자들의 의미 역시 그의 경험적 인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경험적 인식은 비록 표면적 서술에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서술의 행간에 또는 서술의 배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타나는 모순적 서술 역시 저자의 경험적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서술한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창세기 해석에서 크게 이견을 보이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이 논문은 특히 '욤'(날)과 '라키아'(궁창)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 결과에 따라 기독교 창조론의 개혁 방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이유
창세기를 읽어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창조명령과 창조사건들의 진행을 서술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에 모순적 서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모순적 서술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책임은 모세에게 있는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
모순적 서술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위는 훼손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창조사건들을 보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성경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기독교적 방법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영에 인도되어 환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사건을 듣고 보고 창세기를 썼다고 추론하는 길밖에는 없다. 모세가 환상 중에 듣고 본 경험과 그의 인식 수준에서 이해하고 기억한 것들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서술했다고 인정하면,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은 모세가 한 일이므로 하나님에게 책임이 전가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고대 히브리인 모세가 맨눈으로 보이는 대로 믿고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창세기를 읽을 때,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역사발전의 당연한 결과로 이해된다. 모세의 서술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고, 현대인들은 첨단 광학기구로 관측한 현대 우주론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가 그렇게 진행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탈피하여 현대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직도 문자주의 해석에 빠져 창세기를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없지 않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지식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또는 거짓말을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대 우주론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결코 그런 주장을 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창세기의 모순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문자주의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창세기의 모순으로 인하여 현대사회에서 점점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마침내 기독교가 믿는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까지 배척하게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민수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민수기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민족이 신 광야 가데스에서 마실 물을 찾지 못하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나서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20:6)는 말씀을 하셨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회중 앞에서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20:11)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씀대로 따르지 아니한 모세의 어긋난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고 심판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도 '손에 쥔 지팡이로 바위를 치는' 행동을 했었다. 여기에서 모세의 서술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가 그의 자의에 의한 불순종인지, 아니면 그의 불완전한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잘못은 그의 책임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창세기의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보면, 창세기의 현대적 해석을 위한 4단계의 이해가 정립된다. 첫째로 출애굽 당시 어느 날에 하나님의 영은 모세를 환상으로 인도하시고, 창조 사건을 보여주셨다. 모세는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가 본 환상을 창세기에 서술했다. 둘째로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창조명령은 동사와 목적어로만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명령에 이미 창조의 목적물에 대한 정보를 모두 넣어놓으셨으므로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브리어로 쓰인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수식어가 길게 붙어 있는 것은 모세가 그의 생각을 덧붙인 설명이다.
셋째로 모세는 하나님이 한 글자씩 불러주시는 것을 들으면서 창세기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일부 모순적인 서술이 있는 부분은 저자인 모세의 불완전한 이해와 기억에 원인이 있다. 넷째로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이 인간 모세에게서 비롯된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창세기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창세기의 현대적 해석은, 필요한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방법을 버리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