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님의 회개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염원하며'라는 주제로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와 강승삼 박사(KWMA 공동회장)가 지난 21일 오전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김명혁 목사는 매달 한 차례씩 교계 주요 원로들과 신앙의 선배들을 주제로 대담을 열고 있다. 대담은 두 사람의 발표와 이후 토론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강승삼 박사는 네비우스 정책에 따른 한국인 최초의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전략을 6가지로 분석하기도 했다 첫째, 이기풍 목는 인간관계를 중요시하여 그들의 필요(Felt-needs)를 채우는 섬김 사역을 통해 그들에게 진정한 필요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Feal-needs)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그는 농번기에는 항상 농촌의 일을 도왔다. 제주도에서 여자들은 바다 물질을 하므로 밭일은 남자의 몫이었는데, 모자라는 일손을 자신의 노동으로 섬겼다"며 "그는 항상 일복과 농기구를 챙겨서 다녔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제시하는데 돌파구가 됐다"고 했다.
둘째,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미신의 문화적 인식을 전도의 도구로 삼았다. 그는 "그들이 습관적으로 엽전 돌려 운수를 점치는 게임을 사용, '이쪽으로 넘어지면 천국이요 저쪽으로 넘어지면 지옥입니다' 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설명했다"며 "그렇게 홍순홍이 예수를 믿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셋째, 홍수피해 지역에서 구제 사역과 난민 섬김 사역을 통해 전도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이재수의 난으로 서양종교 배척 상황이 고조되던 제주도에서, 이기풍 목사는 여러 가지 선한 섬기는 일로 칭송을 받았다"며 "홍수로 떠내려가던 사람들 5명을 구조하고 난민구제 사역을 통해 도민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다"고 밝혔다.
▲강승삼 박사. ⓒ이대웅 기자 |
넷째, 조롱말을 타고 순회 전도사역을 하며 필요를 섬기면서 복음을 전해 교회를 개척했다. 이기풍 목사는 1년만에 회심자 11명을 얻었다. 이에 대해 "제주 문화를 파악하려 순회하다 초기 '말똥 사건'으로 원주민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았으나, 마침 경성에서 유배해 제주도에 와 있던 박영효 대감이 이기풍 목사를 지지해 선교 사역에 큰 힘을 실어줬다"고 했다.
다섯째, 팀 사역과 남녀 연합 전도사역 섬김을 통해 선교의 결실에 박차를 가했다. 강 박사는 "제주도 여성 사역을 위해 평양여선교회에서 이선광 여전도사를, 숭실대와 숭실중학교는 선교비를 모금해 김형재를 각각 파송했다"며 "성서공회도 매서인 1명을 파송해 팀 사역과 연합 사역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제4회 독노회 보고에 의하면, 3년만에 예배당 3곳과 예배처소 2곳, 성도 160명과 17명이 재학 중인 학교 한 곳을 설립했다"고 보고했다.
여섯째, 성령의 치유 사역과 영적 능력 사역으로 주님을 섬겼다. 그는 "당시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 판정을 받은 11세 다리 장애인이 이기풍 목사의 7일간 기도로 걷게 됐다"며 "이후 교회에는 환자들이 많이 찾아왔고, 성령의 능력과 기도로 축사 사역도 섬긴 결과 교회가 부흥했다"고 했다.
강승삼 박사는 "이기풍 목사님의 사랑은 그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깨닫게 하셨다"며 "이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을 것이다. 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회개로 인도하셨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 자녀의 권세(요 1:12)를 주셨고, 전도자와 목사, 선교사가 되게 하셨다"고 말했다.
강 박사는 "이기풍 목사님 부부의 17년 제주 선교는 헌신적인 노력과 기도와 섬김의 전략 선교, 그리고 독노회와 전국 교회의 전적 협력이 있었다"며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열매가 열리게 됐다"고 평가했다.
또 "우리 한국교회는 이기풍 목사님의 회개와 기도와 사랑,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섬긴 높은 영성을 닮으려 염원해야 한다"며 "'죽도록 충성하라'는 계시록 말씀을 생명 다하기까지 지킨 이기풍 목사님의 첫 헌신, 첫 사랑, 첫 섬김의 열정을 되찾아 회개의 영성, 기도의 영성, 사랑의 영성, 그리고 섬기는 영성을 행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김명혁 목사는 "이기풍 목사님은 지난달 나눴던 길선주 목사님과 함께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또 한 분의 '한국교회의 아버지'"라며 "지금 한국교회는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해 알려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불행한 형편에 처해 있는데, 다음 달에도 신앙의 선배님들 중 한 분인 3.1 운동의 주역 이승훈 선생님에 대한 대담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기풍 목사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먼저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다. 그는 "이 목사님은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 두목이었다. 그는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을 미워했다"며 "그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삼열(마펫) 선교사의 말이 너무나 듣기가 싫어, 그에게 돌을 던져 턱을 부서뜨린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마포삼열 선교사는 그럼에도 이듬해인 1894년 평양에 교회당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기풍은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깡패들을 동원해 건축 현장을 모조리 때려 부쉈다. 그러나 선교사는 분개하는 교인들을 달래며 말렸고, 깡패들을 부드럽게 대했다"며 "회개 후 그는 즉시 마포 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고, 마포 선교사는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이기풍은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됐고, 깡패가 전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으로 평양은 발칵 뒤집혔다. 그는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됐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해 훈련을 받고, 1907년 한국교회 최초의 7인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다"며 "마포삼열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은인이었다. 턱에 돌을 맞고서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십자가와 사랑의 복음을 전한 결과 이기풍 목사가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 ⓒ이대웅 기자 |
둘째로,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다. 이기풍 목사는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마포삼열 목사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나라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고,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김명혁 목사는 "이 목사님은 자신이 그랬듯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며 복음의 빚을 갚고 사도 바울의 발걸음을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며 "중간에 마음이 약해져 주저하기도 했지만, 윤함애 사모의 격려가 힘이 돼 이듬해인 1908년 아기를 등에 업고 떠났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이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했던 경험을 모조리 한 것 같았습니다. 13년 동안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다"며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고, 1934년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새벽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회개기도를 처절하게 드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기풍 목사님의 성공적인 선교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수고가 있었다. 윤함애 사모님은 기도의 여인, 사랑과 섬김의 여인이었다"며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도민들을 돌봐줬다.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아보았다"고 했다.
셋째로, '신사참배를 반대한 순교자'이다. 그는 "이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평생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다, 마지막에는 순교의 길로 걸어갔다"며 "제주도 사역 후에는 전라도 복음화를 위해 남은 생애를 바쳤다. 평양 출신으로 이방과 같은 제주도와 전라도에 가서 평생 복음을 전한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명혁 목사는 "이기풍 목사님은 과감히 일어나 일제에 대항해 한국교회를 지켰다. 1936년을 기점으로 강요당한 신사참배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했다"며 "일제는 그를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해 순천 감옥에 투옥하고 갖은 고문을 가했다. 칠순의 노구로 당한 일경의 취조와 고문은 견디기 힘들었고, 광주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 쓰러져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로 드려졌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이기풍 목사님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생애와 운명이 예수님을 믿어 완전히 바뀔 수 있음을 또 한 번 발견합니다. 기질도 습관도 운명도 완전히 바뀔 수 있다"며 "그 변화된 한 사람을 통해 제주도 도민은 물론, 민족의 운명도 바뀔 수 있다. 우리들의 운명이 바뀐 것은 길선주·이기풍 목사님과 같은 분들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뀐 사도 바울의 변화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표하고 또 표할 수밖에 없다"며 "부족한 우리들도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본받고, 이기풍 목사님께서 물려주신 '회개와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영적 유산'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