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시련기에 태어나다
걸어온 인생의 발걸음을 돌아볼 때, 나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는 고백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때는 대동아전쟁의 절정기였다. 일본이 세계정복의 야욕으로 일으킨 2차 대전이 극에 달했던 1942년, 9월 7일 새벽 5시경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에서 정(鄭) 도(道)자, 선(善)자 되시는 아버지(당시 25세)와 어머니 이(李) 정(貞)자, 순(順)자 되시는 어머니(당시 28세) 사이에서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친께서 위로 큰형님 이름을 운탁(運晫))이라 지으시고 작은형님을 운영(運榮))으로, 그리고 내 이름은 운길(運吉)이라 하셨다. 아버지는 본관(本貫)이 진주(晉州)이며, 공대공파 가문의 대(代)를 이어오는 항렬(行列)에 따라 ‘옮길 운(運)’ 항렬(行列)에 따라 우리 형제의 이름을 지으셨다. 어머니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의 후예이다.
당시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박해가 극에 달한 시절이라 입에 풀칠할 양식조차공출로 다 빼앗기고 심지어 집에 있는 놋그릇도 전쟁무기인 대포알 탄피껍데기를 만드는데 쓰려고 모조리 거둬갔다. 전쟁 막바지에는 소나무 송진을 화약의 재료로 쓰기위해 조선인들을 강제 노역시켜 정말 살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때는 민족 최대의 시련기였다.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때문에 나를 임신한 몸으로 춘천 효자동에서 누에고치로 실을 만드는 반도제지 공장의 여공으로 일했다. 중노동을 하면서도 받는 품삯은 형편없었지만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를 키우시며 알뜰하게 생계를 꾸려가셨다.
나는 복중에서 영양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데다가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먹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미숙아인 나를 업고 다닐 때면 이웃사람들이 “무얼 업고 다니느냐?”, “혹시 먹을 것을 등에 감추고 다니는 게 아니냐?” 하는 등 의심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제대로 발육하지 못해서 포대기에 아기를 업은 것 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나는 지금도 형들보다 키가 작고 왜소한 편이다.
29세에 남편을 여의신 어머니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아버지는 25세 청년의 나이로 일제에 징용되었다. 징용자들이 겪은 노동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가 불의의 탄광 폭발로 돌아가셨다. 징집을 당하신지 반년도 채 안 된 2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보다 3살 위이신 어머니가 6개월 전에 생이별하신 아버지의 사망통보를 받은 때가 29세 청년이었다. 그러니까 결혼해서 신혼의 단꿈도 채 누리지 못하고 졸지에 생이별을 하신 것이다.
당시 강원도에서 일본군에 징용되어 강제노역을 하다가 최초로 일본에서 돌아가신 분이 아버지와 다른 한분이 더 계셨다고 한다. 두 분의 유해가 춘천 기차역에 도착하자 역전에서 강원도 도장(道葬)으로 아버지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때는 지금의 도지사를 ‘도장관(道長官)’이라고 불렀는데 그 도장관이 장례식을 마치고 미망인이 된 어머니에게 “하루야마상은 젊은데 벌써 아들이 셋이나 되느냐? 훌륭한 사람이었다.”라고 애도의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등에 업힌 유복자와 다름없는 나를 보며 “훌륭하게 잘 기르라.”고 격려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루야마(春山)’는 창씨 개명한 아버지의 일본 이름이었다.
그날 어머님은 도장관의 말을 고맙게 여기고 나를 도장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나에게 ‘도장관’이라 별명을 지어주셨다. 어머니는 나를 부르실 때는 언제나 “도장관!” 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당시 홍천에서는 친구들과 친인척이나 동네 사람들조차도 나를 “도장관”이라고 불렀고 도장관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남편을 여읜 후 삼형제를 데리고 춘천에서 홍천으로 이사를 하셔서 우리는 한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6.25 전쟁과 피난 생활
내가 홍천국민(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 얼마 되지 않아 6월 25 전쟁이 터졌다. 일요일 새벽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미명에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감행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피난이 뭔지도 모른 채 어디론가 가야한다니 마냥 좋아서 아홉 살짜리 어린것이 이불 한 채를 등에 짊어지고 둘째 형과 같이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열심히 걷고 또 걸어 홍천군 남면 유촌리 동내 뒷산 공동묘지에 다다랐다.
잘 곳이 없는 피난민들에게 묘지는 잔디가 있어서 몸 붙이고 눕기에 좋고 초여름이라서 춥지도 않아 함께 피난길을 떠났던 동네 사람들과 같이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당시 큰 형은 향토방위병으로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자다가 깨어보니 동네 매산초등학교 마당에 밤새 북한군이 들어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인민을 해방시키러 왔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피난민들을 선동하여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피난생활을 접고 다시 홍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애지중지 키우시던 어미 돼지는 울안에서 먹지 못해 힘 없이 누어있었고 새끼들은 울 틈새로 나와 다니면서 풀을 뜯어 먹어 그래도 생기가 있었다. 나는 열심히 어미돼지에게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 열매들과 풀과 죽을 끓여 주면서 기운을 차려 일어날 때까지 돌본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호주기(濠洲機)라고 부르는 전투기들이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지나갈 때와 아군 폭격기들이 홍천 강다리를 폭파하였을 때 하늘을 보니 비행기에서 까만 것들이 무수히 떨어졌다. 점점 더 가까이 떨어지면서 소리가 커지더니 홍천강 다리와 주변에 마구 쏟아지면서 큰 폭음을 내며 터진다. 도랑에 엎드려서 보고 있는데 사방에 이상한 것들이 마구 떨어진다. 나중에 보니 폭탄의 파편들이다. 세 살 위의 형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그 무거운 쇳덩어리 파편들을 주머니에 가득 주워 담아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때까지도 뜨거웠다.
지금은 읍이지만 당시는 면소재지로 홍천은 전쟁 중에 안전하지도 않고 먹을 것이 없어 어머니의 4촌 오빠가 북방면 하화계리에 사시는데 방 한 칸을 내주며 살게 해줘서 어머니는 삯일을 하면서 아들 형제를 키우시며 여름을 났다. 하지만 다음해 겨울 1월4일 소위 1.4 후퇴로 다시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