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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이청준 |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99쪽 | 6,800원

젊은 시절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20대 초 저는 전 교인이 70명이 안 되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교회는 건물 2층에 위치했습니다. 밤 10시에 하는 금요철야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일찍 모인 교인들과 같이 방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행색이 남루한 남자 분이 들어왔습니다. 일순간 긴장감이 돌았고 서로 '어떤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죄송하지만, 제가 배가 고파서 그런데 컵라면 하나 줄 수 있나요?" 물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안도해하며 "컵라면은 없고 돈을 드릴게요" 하며 2천 원을 건넸습니다. 그 분은 연신 고마워하며 나갔습니다.

제가 이 날의 일을 강렬하게 기억하는 건, 남루한 차림의 사람에게 '긴장했다'는 것과 예상 외로 적은 걸 요구해서 '안도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상충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양복차림의 부자인 사람만 와야 하나?'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알고 교회를 다니는 것과 성경대로 사는 것은 같을 순 없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악했던 사람이 모두 다 착해지고, 바르게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의 굴레에 매일 수밖에 없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는 세상적인 도덕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도덕을 안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은 세상적인 도덕은 기본으로 지키고 그 이상의 1%라도 나은 모습으로 살아갈야 합니다. 세상이 인정할 만한 바른 자세 위의 인애를 가지려고 노력할 때 '저 사람은 교회를 다닌다' '저 사람은 진정한 신앙인이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젊은 날 봤던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난 후 거리에서 행색이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저런 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가?' '저런 사람이 내게 왔을 때 나는 피하지 않고 와락 안을 수 있는가?'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도망가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질문을 하게 되고, 한 번도 성경적인 답을 못 내놓는 저를 보며 실망하곤 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이청준의 단편 소설 <밀양>입니다. 원제는 <벌레 이야기>입니다. 이창동 영화감독이 영화로 만들면서 영화 제목으로 바뀐 소설이 별도로 나왔습니다. 원래는 단편집에 실린 소설이었고, 1985년 출간된 책이었습니다. 영화는 소설의 주제 의식은 같으나 주인공의 상황이라든가 직업 등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소설만 놓고 얘기하겠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는 평범한 부부에게 있는 초등학교 4학년인 알암이가 실종됐고(소설에서 알암이의 성별은 밝히지 않습니다. 주제가 얼마나 셌던지, 알암이의 성별이 밝히지 않았다는 걸 모를 정도였습니다), 약 80일 만에 평소 잘 다녔던 주산학원 근처 상가 건물 지하실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범인은 주산학원 원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사형이 언도됩니다. 아이가 실종되고 범인이 잡히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피폐된 아내를 버티게 해준 건, 김 집사의 전도에 의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범인의 모습에서 쌓아올라갔던 신앙심은 와르르 무너졌고 비극을 맞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고, 미안했으며, 가슴 아팠고, 절망스러운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아이가 실종되기 전부터 김 집사는 아내에게 끊임없는 전도활동을 했지만, 전혀 미동도 없다 아이가 실종되고 난 후부터 신앙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점점 열성적인 신도가 되다 아이가 시체로 발견하자 신을 저주하며 절망해합니다.

어쨌든 다시 회복하다 범인이 잡히고 나서 다시 절망하다, 김 집사의 '회유'로 '용서'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아이를 살해한 범인을 만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교도소 안에서 신을 영접하고 '나는 주 안에서 용서받았다'는 말에 분노가 일었고 신앙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갖고 극단의 종말을 맞습니다.

▲소설 <밀양> 속 한 장면.

(Photo : ) ▲소설 <밀양> 속 한 장면.

자, 어떤 것부터 이야기할까요? 저는 이 소설에 대해 할 말이 많습니다. 우선 작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소설은 지극히 반기독교적 정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청준 작가가 반기독교적인 작가냐? 그건 아닙니다. 새빛교회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단편소설 <행복원의 예수>만 봐도 그의 시선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소설을 더 가슴 아프게 읽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청준은 다작 작가입니다. 그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가장 먼저는 소재의 다양성에 놀라게 됩니다. 별 것 아닌 소재를 가지고 소설로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고, 다음으로 어떤 소재도 뛰어난 소설 거리로 만들게 하는 특유의 복잡하면서 깊이 있는 문장력이 있습니다.

이 소설만 해도 간단한 주제이고 분량도 길지 않은데, 요즘 나오는 작가들보다 문장의 지층이 두껍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껍고 복잡하다 보니 늘어진다는 점도 있고 지루하다는 점도 있습니다.

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빠르게 읽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장편소설로 가면 더합니다. 하지만 문장력을 키우는데 아주 좋은 작가이고, 이번 소설은 단편소설이 주는 빠르기와 장편소설이 주는 강력한 주제의식이 잘 녹아든 작품입니다.

작가 이야기를 했으니,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이창동 영화감독에 대해서도 알려드려야 겠습니다. 이창동 영화감독은 원래 소설가입니다. 그의 작품을 다 읽어보진 않았고 영화도 다 보진 않았지만, 몇 개의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공통적인 흐름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이번 영화처럼 노골적으로 비판적이기도 하고 소설과 영화 등 어떤 형태로든 그의 작품에선 기독교에 대한 적의와 조롱이 담긴 장면을 꼭 넣습니다. 그의 소설과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영화 <넘버 쓰리>에서 조직폭력배를 소탕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수사를 진행하는 검사 최민식에게 화가 난 조직의 중간 보스인 한석규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아니 집안에 건달한테 맞아 죽은 사람 있습니까? 왜 거 우릴 못잡아 먹어서 그러는 겁니까?" 궁금해집니다. '이창동은 자신과 집안 식구 중에 기독교인들에게 해를 당한 적이 있나?' 기독교적인 비판의식이 강한 그에게, 이 책은 영화화하고 싶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원작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의 표면을 집어 보겠습니다.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듯 단편소설답게 주제를 향해 전력질주를 합니다. 한 번 읽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단번에 읽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작품성을 떠나 '쉬지 않고 읽게 한다'는 점에선 강력한 장점을 가졌습니다. 속도도 빠르고 초반과 중간중간에 마지막 충격적인 장면에 대해 작가가 직접적인 언급을 하여 긴장과 기대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그런 언질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파격적이고 가슴 아프게 그려내고, 여운을 길게 만드는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소설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시점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건, 내용을 이끌고 있는 건 작가나 주인공인 아내가 아닌 남편이라는 점입니다. 남편이 작가처럼 제3자가 되어 아내의 모습을 관찰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점이 명민한 것이, 시점을 아내로 했으면 감정이 과잉이 되어 문장이 지저분했을 것이고, 작가였으면 지극히 객관화되어 소설이 아닌 '사건일지'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눈으로 본 아내를 조명함으로, 아내의 심리에 대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 파급효과를 극대화하고 있고, 그래서 반기독교적 정서를 더 강하게 갖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간파하여 시점을 달리한 작가의 의도라 보입니다.

인물에 있어 보자면 작가는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분명하다 보니, 주제를 이해하는데 방해된다 싶은 정보를 모두 없앴습니다. 중요한 인물인 부부의 자녀 알암이만 이름만 밝힐 뿐, 등장인물의 성별과 이름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알암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알암이에게만 집중하게 한 겁니다. 그리고 워낙 사건이 강렬하다 보니, 이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문장으로 보자면, 전 문장을 필사해도 좋을 만큼 탄탄하고 짜임새가 있습니다. 한 문장을 읽고 나서 곰곰이 곱씹게 합니다. 이청준 문장의 힘입니다.

자, 이제 가장 중요하고 논란이 되는 이 책의 주제를 알려드립니다. 불신자인 주인공 아내를 교회로 인도하고 주님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는 사람은 김 집사입니다. 그의 전도방법은 지극히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불신자인 아내가 신의 존재를 믿게 된 계기는, 알암이가 실종되고 난 뒤였습니다. '하나님이 아시니 알암이를 찾게 해 주실거다'는 믿음이 든 겁니다. 그런 아내가 신에게 처음 실망했던 건 알암이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였습니다.

"모두가 다 부질없는 노릇이에요. 하나님의 사랑도 거짓말이구요. 하나님이 정말 전지전능하시다면 우리 알암일 왜 그렇게 만들었겠어요. 그 어린것에게 무슨 죄가 있다구....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크시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게 했어야지요(52쪽)."

이때 김 집사는 "거기에 어떤 주님의 섭리가 임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 주님의 사랑과 섭리와 권능을 믿으시면 거기서 알암인 구원을 받을 거예요(52쪽)"라고 위로해 줍니다.

그러다 범인이 잡히고 나서 "죄에 대한 사람의 심판은 끝났다(62쪽)"라며 다가서자, 아내는 다시 회심하여 신앙을 회복하게 되고 범인을 용서하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때 남편은 차라리 범인에 대한 복수심이 있는 편이 더 나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복수심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파국의 발단은 아내가 자기 용서에 대한 증거로 범인을 만나기로 할 때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죽인 범인은 교도소 내에서 신앙을 갖고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한 말에 아내는 발끈하게 됩니다. 아내는 절규합니다.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90쪽)."

저는 이 말에서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영화를 보면 범인의 태연스럽고 뻔뻔스러울 만치 평화스러운 모습에, 예수님을 믿는 저도 화가 치밀어 오르게 했습니다.

이 분노가 작가가 소설을 쓰게 한 힘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1980년 11월 13일 있었던 '이윤상 유괴살해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은 명징하게 남는 것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범인을 잡는데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어이없게도 이윤상이 다닌 중학교의 체육교사였습니다. 소설에서의 범인이 알암이가 다닌 주산학원 원장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바로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했습니다.

"범인이 형 집행 전 마지막 남긴 말이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는 요지였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겠지만, 내게는 그 말이 그렇게 들렸고, 그것은 내게 그 참혹한 사건보다 더 충격이었다('작가 서문'에서)."

소설에서 범인은 장기를 기증하고 사형을 당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더 공분을 사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장기를 받고 살아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기분은 어떨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맨 처음 언급했듯이, 성경의 교리는 세상의 도덕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도덕을 기본으로 하고 더 높은 차원의 무엇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의 도덕도 지키지 않으면서 성경적인 교리를 내세우는 건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겁니다.

교회의 상징인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선의 교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수직선)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수평선)도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이루어진 신앙은 있을 수 없고 그것은 이단일 뿐입니다.

믿는 이는 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람에게도 적용시키면서 세상의 도덕, 사람의 질서를 지켜나가야 하는 겁니다. 또 전도하는 이도 이 원리와 교리를 가지고 해야 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이 중에 행색이 남루하고 냄새나는 이를 안아주고 베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이는 당연히 더 그래야 합니다.

이 책 <밀양>의 원제는 <벌레 이야기>입니다. 누가 벌레라는 겁니까? 무엇이 벌레라는 겁니까? 세상의 도덕, 사람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으면서 성경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조금 확대해 볼까요? 교회에 빨리 가겠다고 적색등일 때 무단횡단하거나 운전하여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에 쓰이는 물품이라고 하면서 판매자에게 정상적인 할인률보다 '더 싸게 달라!'고 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 돈 아니라고 교회 헌금을 착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휘황찬란한 교리를 설명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한 말로 가슴을 찌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라 하면서 세상 법을 무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숱한 죄를 저지르고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 하면서 피해자와 세상 사람들에게 뻔뻔스러운 평화의 미소를 짓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이 '벌레'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이 책은 이런 '벌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책을 두 번 읽었습니다. 한 번은 결혼 전에 읽었고, 다음엔 애를 낳고 난 요즘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잘 썼네'로 그쳤는데, 애를 낳고 키우는 요즘에 읽으니 제게는 작가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달됐고,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마, 모든 부모들이 동일한 분노에 휩싸였을 겁니다.

저는 아직 마지막 장면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간단하게 처리됐지만, 충격적이고 지독한 여운이 남을 정도로 가슴이 아픕니다.

지나치게 주제에 몰입하게 하여 감정을 고조시키지는 않나 하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지만, 이만한 완성도 있는 기독 소설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끝으로 안타까운 건 앞으로도 이런 소설 같은 실화들이 계속 나올 거라는 예감입니다. 1980년 말에 일어난 믿는 자로서 수치스러운 사건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이 안 좋은 예감이 옳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책은 모든 믿는 자들이 읽어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각과 믿는 자의 올바른 자세와 생각을 가지는 계기로 삼길 바라게 됩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