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권혁승 박사(서울신대 구약학 명예교수)의 논문 <'이방인의 때'에 관한 예언과 성취>를 매주 1회 연재합니다.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Photo : )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II. 예수의 예루살렘 관련 예언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한 예언은 모두 세 차례였다(13:34-35; 19:41-44; 23:28-31). 이들 예언들의 공통점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미래 회복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A. 누가복음 13:34-35

해당 본문은 누가복음 9:51에서 시작하여 19:27까지 이어지고 있는 예수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속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예루살렘에서 죽을 선지자로 동일시하시면서(13: 33), 선지자들을 돌로 치는 예루살렘의 미래 운명을 내다보시며 슬퍼하셨다. 깊은 한탄의 애가가 있은 후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뒤따랐다(13:35). 예루살렘이 멸망 받는 원인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였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이 자주 일어났던 예루살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의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선지자로 동일시되신 예수께서는 그곳으로 가셔야만 했다.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이 자주 발생했던 예루살렘은 예수의 사역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모으려 애썼다는 예수의 고백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성경에서 '날개 아래 모으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하는 분이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런 예수의 노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의 집은 황폐하게 된다(눅 13:35).

여기에서의 질문은 그런 결과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 진노의 최종목표인가 아니면 그 도성의 정결과 회복을 위한 서막인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누가복음 13:35의 뒷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 본문은 언젠가 이스라엘이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미래 희망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분석 된다: (a) "너희가...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부정접미사를 통한 메시아 도래의 선언; (b) "까지"라는 조건접두사; (c)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는 메시아 도래의 조건 제시. 결국 메시아의 도래는 이스라엘이 그에게 찬송을 돌리는 영적 회복과 맞물려 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동시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는 미래 희망을 확신하셨다.

B. 누가복음 19: 41-44

예루살렘과 관련한 예수의 두 번째 예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여정에 등장한다. 당시 예수께서는 열정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 가까이 접근하고 계셨다. 예루살렘 성이 눈앞에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애도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말씀을 전하셨다. 평화에 관한 일이 예루살렘에게 숨겨졌고, 그 결과 그곳 주민들은 대적에게 점령당하여 대량으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심판 내용은 다음 네 가지이다: (a) 원수들이 토둔을 쌓을 것이다; (b) 그들은 사면으로 성을 포위할 것이다; (c) 그들은 자녀들을 땅에 메어칠 것이다; (d) 그들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 두지 않고 무너뜨릴 것이다.

42절은 내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문장을 도중에서 끊는 돈절(頓絶)법을 사용하였다. 중간에 생략된 것을 포함시킨다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만일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너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만일"은 성취되지 않을 것에 대한 소망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멸망 원인은 44절인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였다. 여기에서 '보살핌'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스코페'는 히브리어 '페쿠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돌보아주심을 의미한다.  

42절과 44절은 모두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지식이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이 날씨는 예측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징조는 알지 못한다는 책망을 연상시킨다(눅 12: 56-59).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비록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처참한 멸망을 예언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의 역사 전체를 거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회개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의 눈물은 예루살렘을 향한 애정과 친밀감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런 눈물은 예루살렘을 향한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서 예루살렘이 당할 심판을 수용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준다. 예루살렘에 내릴 심판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두  절(43, 44절)에서 개인적 관계가 강조되는 '너'라는 인칭대명사가 무려 열 번이나 사용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만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은 애정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셨다.

C. 누가복음 21: 20-24(마 24:15-22; 막 13:14-20)

예수의 세 번째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은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내용이다(마 24:3; 막 13:3). 성전을 나와 감람산으로 올라가는 도중 제자 중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 후 헤롯대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 배 이상으로 크게 증축하였다. 주전 19년에 시작된 예루살렘 증축은 82년이 지난 후인 주후 63년에서야 끝났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모양이나 장식도 매우 아름다웠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성전 겉면이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 위에 해가 비치면 사람들이 눈을 뜨고 바라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전의 두 번째 예언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예수께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질문하였다(눅 21:7). 예수께서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세 가지 중요한 때를 제시하셨다. 첫 번째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는 징벌의 날이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밟히는 이방인의 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이다.

첫 번째 때인 '징벌의 날'은 주후 70년과 135년 두 차례에 걸친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로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이 사건은 두 번째 때인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방인의 때'는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1967년 예루살렘 관할권의 회복으로 그 기간이 끝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마지막 때인 '재림의 날'이 가까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방인의 때'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회복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