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을 통해 소설 속에 신정론을 녹여냈던 황의찬 목사가, 이번에는 성경에 나타난 성폭력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살핀 <밧세바의 미투>를 펴냈다.
황의찬 목사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제동을 건다. 평범한 장수의 아내에서 왕비가 된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아니라, 절대 강자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던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밧세바뿐 아니라 세겜에게 당한 야곱의 딸 디나와 배다른 동생 암논에게 당한 다말 등을 조명하고 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여검사의 고백으로 촉발된 '미투(#MeToo) 운동'이 있다. 다음은 황 목사가 책에서 못다한 이야기.
-이 책을 쓰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투'를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jtbc에 나와서 인터뷰할 때, 마지막에 말했습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고요. 저 말을 왜 했을까 생각했을 때, 먼저 나중에 보니 가해자가 퇴직 검사로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간증한 동영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한국 '미투 운동'은 기독교에 시비를 걸면서, 기독교 교리에 도전하면서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 아닐까, 하나님의 관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 검사의 방송 인터뷰 이후 폭발적으로 미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로 지목된 검사의 세례에 대해 비판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자격 없는 세례'라고요. 대형교회가 지도자 계층을 끌어들이려 무리하게 세례를 준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증거하기 전에, 교회 내 성례부터 제대로 하라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그러나 제가 볼 때, 그 검사에 대한 세례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까지 비판이 나왔습니다. 두둔해도 부족할 판에 말입니다.
그러면 세례받은 사람이 모든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하나요? 그래서 회개와 세례, 그리고 죄에 대해 묵상하게 됐습니다. 성추행 전력이 있음에도 세례를 준 것이 비판받아 마땅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아주 작은 은총으로도,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는 느낌만 있더라도 충분히 세례받을 자격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세례 이후 믿음 안에서 신앙이 자라난다는 것은, 그 동안 자신의 죄를 하나 하나 깊이 깨닫는 과정 속에서 신앙이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받은 검사를 저렇게 내부에서 비판해도 되는가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회개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지요. 세상에서는 피해자에게 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 '회개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시편 51편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다윗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에 대해 많이 묵상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그리고 밧세바에게 죄를 지었는데, 왜 다윗은 '주께만 범죄했다'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들을 종합해, '미투 운동'과 관련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졌습니다.
이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미투'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를 듣고 정리해 책으로 낼 수 있다면, 믿는 사람들이 '미투'에 대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다 싶어서, 계획했던 집필을 잠시 미루고 이것부터 쓰게 됐습니다."
-말씀대로 성경 속에 '미투'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다윗의 회개와 관련해 하나님께서 징벌하신 내용과 사무엘상하 역사서를 읽으면서 '아히도벨'이라는 인물에 주목해 왔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친할아버지였습니다. 손녀가 왕비인데, 오히려 압살롬의 책사가 됐지요.
그는 손녀딸이 왕비가 되는 것보다 우리아의 아내로서 '일부종사(一夫從事, 평생 한 남편만을 섬김 -편집자 주)'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둔 것 아닐까요? 우리도 일개 헷 사람 우리아의 평범한 아내에서 왕비가 됐다는 쪽으로 생각하기보다,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한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 가치관 속을 살다가, 성경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바꿔 나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신앙의 태도일 수도, 성경을 읽는 자세일 수도 있겠지요. 세상적으로는 A가 훨씬 가치 있지만, 성경은 B가 더 가치 있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성경이 옳겠거니' 생각하고 성경의 가치관을 취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히도벨의 가치관이 더욱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관대작의 부인으로 사는 것보다, 처녀로서 처음 정조를 바친 그 남자와 평생 해로(偕老, 부부가 한평생 같이 살며 함께 늙음 -편집자 주)하는 것이 성경적이겠지요.
'미투 운동'도 남편을 통한 출세나 삶의 도드라짐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정절을 처음 바쳤던 남자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생 해로하는 것이 여성의 삶으로서 가치 있음을, 그것을 주장하고 실현하는 것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여성의 삶에서 정절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밧세바는 다윗에게 불려갔을 때, 자신의 정절을 짓밟혔습니다. 존중받은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던 사이에 짓밟힌 것이고, 마태복음 기자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라 표현함으로써 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평생 호위호식했지만, 성경은 우리아의 아내로서 그녀의 삶을 더욱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네요.
"한국에서도 여성의 삶이라는 것은 '뒤웅박 팔자'라고들 합니다. 누가 남편이 되느냐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미투 운동'은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성으로서 정절과 성 정체성을 실현하는 데 있어, 남자의 사회적 지위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순정과 애정, 정절과 사랑을 쏟아부어 한 남자와 평생 같이하고 싶어 주체적으로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삶의 가치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왕비가 됐다 해서 그것이 더 좋은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미투'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게 아닐까요.
밧세바가 다윗에게 처음 불려가는 모습을 보고, 전 충남지사 안희정 씨에게 '미투'를 선언한 그 비서가 떠올랐습니다. 김지은 씨가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고요. 무엇을 명령하든 '노' 할 수 없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밧세바의 미투'였습니다. 밧세바는 김지은 씨처럼 유린된 것입니다. 신분 상승의 디딤돌이 아니라, 짓밟힌 사건입니다. 미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남성들은 여성을 보면 성욕이 생기도록 만들어졌다고요. 그러나 그것은 죄악의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아내를 보고 성적 욕구가 일어나야 맞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설득력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느끼지 못할 뿐, 죄의 결과입니다. 목사님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걸(성욕) 다 없애면 어떻게 출산이 되느냐고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내 외에 다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간 정말 그 여성들의 상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읽었네요. 목사님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하셨는지요.
"제게 페미니즘 기질이 조금 있습니다(웃음). 위로 누님이 3명, 형제가 6명에 셋째였는데, 어린 시절 누님과 형들이 싸우면 누님 편을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여성에 대해 '연약한 그릇'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처럼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비록 남성우월주의로 빠질 수도 있지만, 우리 세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사도를 발휘해야 한다고요(웃음). 그게 유럽의 문화이기도 하지요.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어떤 관계로 창조하셨을까요. 창세기에서는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돕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여자가 더 강합니다. 목회자로서도 여성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회개란 무엇인가요.
"시편 51편 4절을 통해, 회개는 피해자보다는 하나님께 해야 한다는 묵상을 평소 자주 했습니다. 기독교 교리로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 검사의 '회개는 피해자에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 꽂혔습니다.
그래서 처음 집필할 때는 가해자 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자칫 그 사람이 신앙을 버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서였지요.
저는 목회자로서, 그 사람이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잘 견디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성경에 깊이 천착하면서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있습니다. 이 바람을 처음에 줄거리로 쓰기 시작했지요. 책에 나오는 성경 이야기들을, 가해자 검사가 천착해 들어가는 과정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보기에 가해자를 옹호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는 조언을 듣고, 인쇄 직전에 급히 멈췄습니다. 멈추고 숨을 돌리면서, '이 책 집필이 하나님 뜻이 아닌가'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다 소설가 한강의 책 <흰>을 읽고, 이렇게 쓰면 되겠다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얼개를 잡고, 가해자와 피해자 검사는 일단 제쳐놓고 좀 더 성경에 충실하게 다시 썼습니다. 3/4 정도는 재활용했고, 1/4 정도만 보충하면서 판을 다시 짰습니다. 하나님의 터치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도 받아야 할텐데요.
"안 그래도 책에 인과응보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큰 주제가 '미투'이지만, '인과응보'는 신학적으로 민감한 주제입니다. 제 삶이 인과응보에 민감하기 때문이기도 했고요. 책에 조금만 녹여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부당하게 취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바로 인과응보로 나타났습니다. 책에서 누누이 강조했지만,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질고가 밧세바를 부당하게 대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인과응보의 세계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이 세계에 인과응보가 적용됐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응보를 블랙홀처럼 다 끌어안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심으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속하심으로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지, 인과응보를 적용받으면 우리가 어찌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이는 미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밧세바를 부당하게 취한 다윗을 인과응보로 다스리십니다. 살인 이상의 죄악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책 뒷부분에 반전이 나오는데,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미투보다도 완벽한 미투가 바로 '밧세바의 미투'입니다."
-백년해로, 일부종사 등의 말씀을 하셨는데, 혼전순결 관념이 성경에 명시돼 있나요.
"성경에 혼전순결을 직접 주장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책에서 성폭행을 저지른 남성의 두 타입-얼음(Ice)과 불(Fire)-을 소개했는데, 여기서 혼전순결의 근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섹스란 남성의 심리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섹스 이전과 이후는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어느 타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결혼 전 성관계를 허락해 버리면, 이후 차갑게 식어버리는 '얼음 타입'의 경우 암논처럼 거기서 끝나 버립니다. 그렇다고 성관계 후 연모의 정이 뜨겁게 타오르는 세겜의 '불 타입'이 긍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혼전순결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평소 생각해 왔습니다.
성경에도 안 나오는데, 교회가 혼전순결을 가르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신약에는 그런 사례가 거의 없지만, 오히려 구약을 보면 성 관념이 아주 문란합니다. 저는 이 두 타입을 통해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부모가 딸에게 혼전순결을 가르칠 때, 남성의 심리가 이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요시하는 가치라고 하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아들들에게도 '사랑하는 여성일수록 아껴줘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지요.
두 타입이 모두 위험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다릅니다. 평생을 약속했기에 도망쳐버릴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결혼하면 제도적으로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안에서의 미투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여성을 여성되게, 남성을 남성되게' 보았으면 합니다. 앞의 여성과 남성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여성과 남성입니다. 그 모습대로 제대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은 남성을 돕는 배필이고,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면서 창조의 목적을 달성해 가야 합니다.
미투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가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렇게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여러 음성들 중 하나가 '미투'일 수 있습니다. 미투 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도록 '여성은 여성되게, 남성은 남성되는' 사회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각 교회 목사님들이 미투에 대해 설교한다면, 일단 남성들은 좀 자제해야 하고 여성들을 더 이해하고 보호하려 해야 하고, 여성이 연약한 그릇임을 알아야 한다는 쪽으로 설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류 역사상 남성은 힘과 사고의 우월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성의 삶도 충분히 존중돼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 인류 역사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누구나 그것을 수긍하지요. 이 흐름이 너무 지나칠 정도가 됐기 때문에, '미투 운동'이 시작되도록 섭리하신 것 아닐까 합니다.
성경을 떠난 '미투 운동'은 또 다시 약육강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철학은 '여성은 여성답게, 남성은 남성답게'가 돼야 합니다. 목회자나 신학자, 크리스천들이 미투의 의미와 지향점, 푯대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 푯대가 세상 학문이나 사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투 운동도 잠시 떠들다 말 거 같으니, 여성들이 '반라 시위'까지 하면서 나서는 것입니다. 철학이 없다는 방증이지요. 이 책의 의미는 미투의 푯대를 성경에서 찾자는 것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하나님 음성에 함께 귀를 기울여 봅시다.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한국에서 '미투 운동'은 기독교를 건드리면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해야 한다'는 말 속에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니, 미투 운동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발상은 또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그렇게 짓밟았지만, 어쨌든 평생 책임졌습니다. 또한 평생 칼에 시달렸고, 반역을 저지른 아들 때문에 도망까지 가야 했습니다. 가해자로서 그것을 다 감당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는 말만 콕 끄집어내서 '용서 운운'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도 크게 반성해야 하고, 목회자들이 평소에 이런 부분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용서받았다고 하려면, 다윗이 당한 것의 1/100 만큼이라도 당해야 하지 않을까요. 책임지지도 않고, 죄값도 받지 않으려 하면서 용서를 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의외로 밧세바를 '꽃뱀'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올라가고 왕비가 됐으니, 그의 인생에 손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먼저 미투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회성 사회현상으로 물끄러미 쳐다만 볼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돌봐야 합니다.
이어 미투를 통한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고, 나아가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더 이해해 보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여성들도 같은 여성들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