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마서 8:37>은 담임목회자 강요섭(서동갑 분)의 직분에 대한 탐욕과 젊은 여신도들에 대한 연속적인 성범죄로 인해 내부적으로 망가지는 부순교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일은 한국 중대형교회에서 비교적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교회와 성범죄: 이제는 '식상한(?)' 교역자 성범죄
작중 강요섭 목사 사건을 조사하다 보도를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린 방송국 P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송 안나갈 거에요. 요새 그 목사들 성추문이 뉴스거리도 안 되고...."
영화는 이 사안을 은폐하기 위해 '야합'하는 교회, 노회, 교단의 행각을 치밀하게 재현한다. 그간 한국 기독교계는 교역자의 성범죄 사건에 대해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 변명하며 사안을 은폐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왔고, 법정투쟁으로 비화되지 않는 한 거의 항상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며 문제를 봉합하는 편을 택했다. 목회자 성추문이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현실을 초래한 것은 바로 이처럼 자정의 노력 없는 교회 및 교단들의 행태 때문이 아닐까?
중대형교회의 목회를 담당하든 아니면 소규모의 목회를 담당하든, 현실에서 필자가 만나 온 선후배 목회자들 대부분은 성추문이나 성범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스럽게 자신을 돌아보는 분들이었다. 필자는 여러 교단들이 비록 핑계처럼 내놓는 말이긴 하지만, 목회자 및 교역자의 성범죄 및 성추문이 '일부'에 국한된 일이라는 해명을 믿고 수긍한다. 주류 언론의 보도나 온라인상 풍문에서 볼 수 있는 태도, 다시 말해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잠재적인 성범죄자인 것처럼 사안을 확대해석하는 태도는 심각한 현실왜곡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왜곡은 교회와 교단들이 자초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일부 자격 없는 교역자들을 비호하며 피해자들을 신앙의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내려 하는 교회와 교단 내부의 기류는, 결국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교계 전체가 내부의 성범죄자와 한통속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성범죄와 미국교회: 미국 교계의 교역자 성범죄에 대한 문제의식
교회 내에서, 그것도 목회자나 평신도 주축 봉사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성범죄 문제를 공론화하기 쉽지 않은 점은 미국도 매한가지다. 그렇지만 미국 기독교계는 점차 교회 내 성범죄 문제에 대해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예방 및 대응체계를 갖추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미국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일단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내부적으로 교역자 및 평신도에 의해 자행되는 성범죄 문제를 조직적으로 예방하고 대응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랭캐스터 신학교(Lancaster Theological Seminary) 감리교 신학 교수이자, 미국 연합감리교(the United Methodist Church) 소속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전권위원회(General Commission on the Status and Role of Women)'에서 활동 중인 대릴 스티븐스(Darryl W. Stephens)는, 2011년 교회 내 교역자와 평신도들의 성범죄 문제를 주제로 삼은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Sex and the Church'라는 드라마 제목을 연상시키는 다소 자극적인 표제를 단 이 논문에서, 스티븐스는 미국 기독교계도 1990년대 이전까지 교회 내 성범죄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논문에서 정의하는 교회 내 성범죄란 다음 행위들이 포함된다.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이 부분은 특히 미국 가톨릭교회에 해당되는데, 미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이 아동에게 저지르는 동성 성폭행이 자주 문제로 부각된다), 성인에 대한 성적 학대, 성희롱, 강간이나 성행위 협박,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말이나 태도, 불쾌한 신체접촉이나 구애, 스토킹 등이다. 이 모든 행위는 주로 교역자 혹은 주축 봉사자들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편에 있는 평신도들에게 자행하면서 발생한다.
스티븐스에 의하면, 미국 기독교회 내에서 성 문제를 논의할 때, 대부분 혼인한 부부 간 건전한 성관계를 지키는 일 외에는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을 도외시한 성에 대한 의식 때문에, 미국 교역자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및 교회 내에 확산되는 동성애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성범죄 문제로 심각한 난관에 처한 경험이 있던 교단들 중심으로 개선이 이뤄지고 있기는 하다. 괄목할 만한 개선점은 바로 교회 내 교역자 및 평신도의 성범죄에 대한 인식 변화다. 1980-90년대까지 미국 교계에서 이런 성범죄 문제가 공론화되지 못한 주된 원인은 이 문제를 범죄자 개인의 성적 부도덕에 의한 것으로만 취급해버린 잘못된 인식이었다.
사실 교회 내 성범죄 문제에 있어 개인의 성적 타락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교역자의 권한 남용이다. 성폭행 혹은 성추행이라는 행위 자체도 심각한 죄이지만, 그보다 이 죄를 자신을 따르는 목회 대상자들에게 저질렀다는 것이 더 큰 죄악이다. 이는 영혼을 돌보고 사랑해야 할 교역자 및 봉사자의 직분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생한 다수 교회 및 교단들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했다. 비록 일부의 문제라도 본질적으로 교단 교역자들의 영적 권위 자체를 뒤흔드는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기에, 교단들은 이를 해당 교역자 개인의 성적 타락이나 실수로 취급했을 뿐이다. 이 범죄가 기본적으로 영혼을 섬기는 목회의 소명을 근본적으로 배신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애써 부인하려 했고, 이로 인해 미국 교계에서도 성범죄로 인해 목회자가 면직을 당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런 상황은 여러 교회와 교단들에 재앙을 초래했다. 피해자의 증언, 교회 내의 소문, 그리고 사법기관의 조사와 처벌이 뒤따랐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문제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독교계의 모습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가 심히 실망했다.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목회의 권위를 완벽히 상실하리라는 위기감 때문에, 연합감리회를 비롯한 일부 교단들은 적극적인 개선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물의를 일으킨 교역자 및 직분자나 봉사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 및 징계와 같은 사후조치는 물론, 예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정기적으로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 교단들은 신학교들이 교역자 후보생들에게 성 문제에 관해 적절하고 충분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고, 이에 목회자들과 교회의 주축 봉사자들이 필수적으로 성범죄 예방 교육에 참여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교육 내용으로는 교회 내 성범죄자 처리 방침, 실제 신자들을 대함에 있어 주의할 사안들(예를 들어 '허깅'을 금지하는 것이 있는데, 미국에서는 친숙한 사람들 사이에 허깅이 비교적 흔하게 이루어지는 편이다), 그리고 미혼 교역자들이 이성교제시 주의해야 할 사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미국 교단들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런 교육과 권징은 모두 권한 남용을 통한 성적 학대를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교회 내 성범죄는 개인의 성적 타락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회자 및 봉사자에게 부여하신 권한을 남용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 중범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부 교회 및 교단들이 이런 성찰에 호응하는 가운데 물의를 일으킨 인물의 면직을 정당화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신도들과 일반인들에 대한 신뢰 회복에 힘쓰고 있다.
◈성범죄와 한국교회: 개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
반면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교회 내 성범죄를 목회자나 직분자 개인의 문제나 연약함의 발로 정도로 치부해 버리려는 행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는 목회자, 직분자, 주축 봉사자 개인이 성적인 죄로부터 자유롭다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대책을 수립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앞선 칼럼에서 언급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이런 인식은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vinism) 성향의 신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자기정당화를 부추긴다. 성범죄를 저지른 인물에게 이런 일을 저지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였으므로 이 범죄는 불가항력적이었다는 식의 억견(臆見) 적 논리가 의외로 한국교회들에서 자주 확인된다. 평상시에는 복음에 걸맞은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다가도, 심각한 물의가 발생하면 즉시 불가항력적 역사에 기대는 행태가 반복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 해당 교역자를 추종하는 부교역자 및 평신도 무리가 존재하면 문제를 은폐하거나 범죄자를 감싸는 행태가 극단으로 치닫는다. 교단도 이미지 관리와 교세 유지를 위해 면직 결정을 내리는 데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 <로마서 8:37>은 이 모든 행태를 일점 누락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한국교회 내부에서 교역자 및 직분자들의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식으로 신학교 목회자 훈련 과정을 거친 이들은 교육 과정에서 은사(恩師)들과 선배 목회자들로부터 성적 타락에 빠지지 말라는 진심어린 권고를 자주 듣게 된다.
목회자 지망생들의 성적 타락 예방을 위한 서적도 많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한다.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의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1997)> 등이 대표적이다. 목회자 에세이 형식으로 이 문제에 경종을 울리는 이들도 있다. 작년(2016년)에는 큰나무교회 박명룡 목사가 성결교회 목회학 학술지 <성결교회와 신학>에 '성범죄를 예방하는 목회 연습'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기고하기도 했다.
사실 한국교회 목회자들 대부분은 교역자 및 직분자의 성범죄가 교회를 얼마나 심각하게 좀먹는지 절감하고 있다. 다만 사안이 심각한 지경에 이를 때마다 이 문제를 목회 직분의 정당성 및 권위와 관련된 근본 문제로 취급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있고, 이것이 한국교회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교역자 및 직분자의 성범죄 문제가 대두될 때, 한국사회가 교회로부터 기대하는 바는 합당한 권징의 단행이다. 한국 사회는 해당 인사의 면직과 함께 범죄 사실에 따른 적절한 처벌을 기대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확립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법적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의 영혼의 구제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영화 <로마서 8:37>에는 강간과 성추행을 당한 여신도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들과 이들의 가족 및 주변인 모두 부순교회 신도들이었다가 사건 발생 후 함께 교회를 등진다. 영화에서 자세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맥락상 이들 모두 단지 교회를 옮긴 게 아니라 교회생활 자체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칼빈이 주장한 대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 사람의 의지를 아득히 초월하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신앙의 길로 견인된다면, 교역자나 직분자의 성범죄로 인해 상처 입고 좌절한 영혼들의 교회 이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견인을 분쇄한 죄악의 중함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결국 스티븐스 교수가 말한 대로, 한국이나 미국이나 동일하게 교역자 및 직분자의 성범죄는 개인의 성적 타락이기 이전에 영혼 구원의 길을 막는 권한 오용이자 목회의 소명을 배신하는 중범죄라는 사실이 피해자들의 처지를 통해서 확인된다.
◈성범죄와 신앙: 변명을 묵살하는 신앙의 모범들
교회 내 성범죄는 성적 행위 그 자체도 문제지만, 영혼을 성욕 충족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목회 및 봉사에 부여된 권한을 개인의 권력으로 전용하는 탐욕과 우상숭배가 더 큰 문제다. 영적 권위와 권한을 고의적으로 악용한 이런 범죄는 법적으로도 그렇지만, 교회 내부적으로도 단호하게 단죄해야 할 문제가 분명하다.
그러나 목회를 신앙의 소명이 아닌 '기능'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한 까닭에 공의의 확립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처분이 내려지고 있다. 설교로 인기를 끄는 목사,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목사에게 성범죄 정도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는 불의한 사고가 교회 지도부 내에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 때문에 교회 내 성범죄는 목회자의 탓이 아니라 빌미를 제공한 여신도 탓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교계 전체에 큰 충격을 준 한 유명 목회자의 여신도 상습 성추행 의혹 제기 당시에도, 해당 목회자를 추종하던 이들 사이에서 이런 주장이 즉각적으로 제기되었다.
피해자가 부적절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목회자가 순간의 유혹에 넘어갔다거나, 교회를 장악하려는 경쟁 목회자 측이 피해자와 공모해서 만들어 낸 모함이라거나, 심지어는 이단 교파에서 보낸 꽃뱀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것이 일반 언론을 통해서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는 모두 교회 내 성범죄가 목회 및 봉사의 직임을 맡을 자격 전체를 무너뜨리는 수준의 범죄는 아니라는 인식에서 유래되는 행동들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서 8:37>은 이 부조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영화는 교회 내 성범죄 인식 전환을 위해, 여신도에 대한 성범죄가 목회자의 직분을 하나의 권력으로 전용하는 악질적 행위임을 명료히 드러내려 한다. 이를 위해 작중 서사는 강요섭 목사가 강간 피해자인 청년부 자매 지민을 심적으로 혼란시키고, 결국 영적 지도자가 아무리 부당한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거기에 저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과정을 자세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의 정점인 목회실에서의 성폭행 장면을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관객에게 노출시킨다.
아무래도 본 작품이 인기를 모으는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거리가 먼데다, 개인적으로 오전 상영시간을 이용했기 때문에 상영관에 관객은 필자를 포함해 단 여섯 명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대목에서 관객들이 한숨 쉬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이 성범죄 장면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관객들 모두 기독교인이었던 듯한데,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죄악의 참상에 괴로움과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의 문제를 대할 때, 기독교 신앙이 내세우는 기본 정신은 한결같은 성결함이다. 특히 목회나 봉사를 담당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성결함이 직분 자체를 맡을 수 있는 기본 자격요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카시키아쿰(Cassiciacum)과 타가스테(Thagaste)에서 영적 훈련을 받기 직전, 어린 시절부터 동거했던 여성 플로리아와 결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의 천재성을 본 가족들은 아퀴나스를 베네딕토 수도회(Benedictine Order)에서 교육받게 했으며, 훗날 그가 베네딕토회 소속의 수도원장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베네딕토회 수도원장이란 직함은 부와 명성이 보장된 자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19세 되던 해 도미니코 수도회(Dominican Order)에 가입하자, 그의 가족들은 아퀴나스를 납치해 집안에 감금하고 베네딕토회로 돌아오도록 회유하고 협박한다.
13세기 당시의 도미니코회는, 앞서 영화 '성 프란치스코 vs 루터' 칼럼에서 설명한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와 마찬가지로 청빈과 구걸의 삶을 신앙으로 여기던 수도회였다. 아퀴나스가 뜻을 굽히지 않자, 가족들은 그가 차라리 성직을 포기하고 세속에서 성공하는 길을 찾게 하기 위해 그에게 매춘부를 들여보내게 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 여성의 반복적인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결국 도미니코회의 위대한 신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한국 최초 7인의 개신교 목회자 중 한 사람이다. 원래 평양은 조선시대 내내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의 도시였고 가장 많은 수의 기생들이 살고 있던 곳이다. 그가 평양에서 목회한 후로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나자 평양 유흥가의 경기가 급격히 쇠락했다.
이에 평양 기생들은 길선주 목사를 추락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평양 유흥가에서 파견된 기생은 몇 달 동안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며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등 신실한 교인의 모습을 보이다, 길선주 목사를 식사에 초대해 유혹하려 했다. 이에 길선주 목사는 누워서 바닥을 뒹굴며 "길선주 살려! 나 죽는다!"를 외치며 흉계를 물리쳤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예는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자의 독신 의무를 강조할 때 자주 동원되는 것이지만, 사실 독신 의무는 성서 어디에도 명시된 바 없다. 독신 의무는 11-12세기경 성직자들의 심각한 축첩 행위, 그리고 이로 인해 출생한 다수의 자녀들 때문에 성직자들의 교회 재산 횡령이나 유출이 심해지면서 교황령으로 정해진 것이지, 성서적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여기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예를 든 이유는, 기독교가 종교개혁 이전에도 성적 타락에 굴하지 않는 것을 참된 성직자의 요건 중 하나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필자는 길선주 목사와 유사하게 성적 타락의 위협을 단호하게 극복한 여러 선후배 목사님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적 타락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목회자는 목회의 원동력을 상실한다고 믿는다. 외부의 유혹에 굴복해도 그리된다면, 과연 계획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교역자나 직분자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할 것인가?
미국 기독교계는 스티븐스 교수가 밝힌 대로, 이 사실을 점차 정직하게 인정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화 <로마서 8:37>은 한국교회가 이런 성찰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한국 사회의 기대를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전달하고 있다.
교회 내 성범죄는 분명 '일부'의 문제다. 그러나 이 일부의 누룩을 단호하게 제거하지 않음으로써, 한국교회 전체는 굳이 떠맡지 않아도 될 죄의 멍에를 함께 지고 있는 듯하다. 목회는 기능이 아니라 신앙이며 소명이라고 외치는 <로마서 8:37>의 메시지를 귀기울여 들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