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
지도자가 하나님 은혜와 능력을 계속 체험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치 자기가 자기 능력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생깁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자기 요구대로 다 들어주시며 조금 실수를 해도 다 알아서 처리해 주실 것이라고 간주해버립니다. 물론 하나님은 지도자를 따르는 백성들을 감안하고 그간의 지도자의 수고도 기쁘게 받으셔서 그 실수나 잘못을 더 큰 은혜로 바꿔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합력으로 선으로 베푸신다고 해서 지도자마저 나태 교만해져선 안 됩니다. 그 둘은 별개의 사안일 뿐입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이나 치는 죄를 범한 원인도 마치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는 양 착각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도자라면 더더욱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도 두 번이나 바위를 쳤습니다. 온전한 헌신과 순종은 절대적인 믿음의 바탕에서만 나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과 불신은 물론, 인간적 생각이 개입되면 완전한 순종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선 단지 그 방식만 똑 같이 했다고 순종은 아닙니다. 부하 직원이 불만과 미움을 잔뜩 안고도 겉으로는 시키는 대로 차질 없이 수행하여서 인간 상사를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만약 모세가 불만과 의심을 안고서는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바위를 치지 않고 말로만 명했다 쳐도 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지금껏 본문에 대해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지팡이로 바위를 쳤다는 사실에만 주목해서 가르쳐져 왔다는 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세의 단 한 번의 불순종
성경 기록에 따르면 모세가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움을 받고난 이후에 범한 잘못은 오직 이것 하나입니다. 또 이 잘못 하나 때문에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엄청난 벌을 받은 것 같지만 지도자의 잘못을 하나님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여실히 드러난 예입니다.
한 번의 잘못이라면 모세의 불순종이 단회적 일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하나님을 향한 생각에 갑작스런 혼동이나 착각이 생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모세가 처했던 당시 정황과 여건에 그런 불순종을 야기 시킬 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본문이 포함된 민수기 20장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민20:1) 그동안 동역해오던 모세의 여동생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슬픔에 잠겨 있었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음을 쉽사리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위에 백성들이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다고 또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동안 믿고 따랐던 자기들 지도자의 개인적 사정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당하는 모세의 입장은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불평이 끝도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껏 최선을 다해 백성들의 모든 불평과 고충들을 여호와의 뜻을 물어 처리해 주었습니다. 해결해주지 못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장 물이 없다고 새삼 불평입니다. 지금껏 모세가 매사를 처리함에 일일이 여호와께 물어본 후에라야 시행하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모세에게 불평을 퍼붓는 것은 실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렇게 한 셈입니다.
지금은 또 광야에서 방황하던 40년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입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그만큼 신앙의 연단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동안에 하나님께 배역하는 죄로 벌 받아 죽기는 했어도 생활여건의 결핍으로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생존의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인 물은 당연히 부족함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신8:4)
그럼에도 그들의 믿음은 한 단계도 성숙하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습니다. 광야를 40 년간이나 돌고 돌았지만 결국 출애굽 당시와 별반 나아진 것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의 풍족함과 궁핍함이 그들 믿음의 진지함과 헌신도를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였습니다. 백성들 불평 그대로 물 없는 광야 40 년 동안에도 하나님이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그 뜻은 전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떡으로만 사는 존재라고 자기들 위치를 정하곤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혹여 그 말씀이 떡을 풍족케 해준다는 약속이면 몰라도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 40년 전에 비해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때나 지금이나 믿음 자체가 없는 셈입니다.
지팡이의 진짜 용도는?
정작 문제는 모세였습니다. 백성들 수준이야 어차피 그 정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회막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던 그 또한 지난 40년간 흡족할 정도로 믿음이 성숙해진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의 믿음 상태를 유추할 수 있는 힌트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미한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은 물이 없어 "우리 짐승"까지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불평했는데, 하나님은 그 짐승에게 줄 물도 넘치도록 바위에서 내겠다고 했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8절)고 모세에 일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팡이를 단지 "회중을 모으는 데"에만 사용하라고 했지, 그것으로 반석을 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반석에다 대고 명하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라기보다 지팡이를 들어야 하는 목적과 의미를 모세는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지팡이는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를 가를 때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고도 신비한 권능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반석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세는 단지 대행만 할뿐이지 당신께서 직접 일으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론은 물론 모든 회중으로 알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은 홍해를 가르는 것 이상의 이적이라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바위 덩어리에서 큰 샘을 이룰만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말입니다. 어쩌면 광야의 메마른 반석에서 그 수많은 백성과 짐승들이 마시고 남을 물을 만들어서 샘솟게 하는 일이 이미 있는 홍해 물을 가르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분에겐 그 어떤 것도 힘든 일이 아니지만 인간 상식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를 때처럼 지팡이를 하나님 권위의 상징으로 쳐들고서 너희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선언했어야 했습니다. 백성들로 지난 40년간 비록 광야이긴 해도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게 인도한 것이 얼마나 크고도 풍성한 은혜였는지 제발 깨달으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힘껏 치면 백성들은 그의 힘으로 바위를 깨트려 물을 낸 것 같이 오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모세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은 시름에 젖어있는데다 백성들이 끝없이 불평하자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난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그 짜증을 전가해선 안 됩니다. 백성들 눈에는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도 아주 건방지게 행동한 것 같이 비춰질 테니까 말입니다. 지도자의 전적 헌신과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세가 단지 인간적인 짜증과 화만 내었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이해하고 용서해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데다 단 한 번 불순종한 모습을, 그것도 명령을 수행하는 방식에서만 차이를 보였으니 말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대놓고 의심 내지 불평하는 말들을 쏟아 놓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모세가 이번에도 당연히 지팡이를 들고 치라고 말씀하셨으리라 착각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성질이 급한 그인지라 하나님의 명령을 주의 깊게 경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0년 전의 똑 같은 경우에는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했으니(출17:5)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리라 지레 짐작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자신의 감정과 주위 정황에 쏠려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화를 내며 지팡이로 바위를 친 것만이 잘못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전의 사역경험의 타성에 젖어 하나님의 엄위한 말씀조차 건성으로 들은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정해진 방법에 따라 일어난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의 열성과 수고로 그분의 역사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했거나 말입니다.
모든 경우에 다 통하는 하나님 방식은 없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바위는 반드시 틈이 벌어져야, 최소한 바늘구멍이라도 생겨야 그 사이에서 물이 나옵니다. 따라서 지팡이로 치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주 합리적이며 눈에 보이는 방법이 됩니다. 그런데도 반석에다 대고 말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누가 들어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명령입니다. 큰 망치로 장정 수십 명이 들어붙어 끈질기게 내리쳐야 겨우 틈이 생길까 말까인데 말만 하라고 한 것입니다.
거기다 모세는 지팡이가 아주 큰 능력을 지녔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에 불과 합니다. 실제로 모세가 40년간 양치기 하는 동안 들고 다녔던 아주 낡고도 볼 품 없는 지팡이였습니다. 레이저 검처럼 지팡이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 지팡이에서 엄청난 능력이 나타나 바위를 깨트릴 것이라고 착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그랬으니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때에 가로막은 요단 급류 앞에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강에 첫 발을 내딛자 물이 갈라섰습니다. 언약궤는 그 자체에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급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순종했기에 홍해와 버금가는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이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당신의 권능을 당신께서 증명하고 당신의 자녀에게 큰 은혜를 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처음으로 불림 받았을 때에 하나님은 지팡이를 던지라고 명했고 모세가 그대로 준행하자 뱀으로 변했습니다. 다시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명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자 다시 지팡이로 변했습니다. 머리부터 잡아야 하는 뱀을 꼬리 먼저 잡으라고 명하신 것은 상식과 반하는 명령이었습니다. 곧바로 물려 즉사할 수 있습니다. 그 때의 모세는 하나님께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스라엘을 구출할 열정과 믿음으로 아무 두렴, 주저, 의심 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지난 40 년간의 광야 지도자 생활이 그를 오히려 타성에 젖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선 모세가 화낸 사실보다 하나님이 이전에는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했지만 지금은 단지 말로 명하라고 지시한 것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광야 생활을 마감하는 시점에 모든 백성들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도덕적 신자가 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지 않고 성경만 읽고 묵상하라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지 테스트해 보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과 당신의 역사에 대해서 상식적 판단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절대로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는 역사하지 않으며, 각각의 상황과 각각의 사람에게 다 다르게 당신만의 특유한 방식으로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하나님의 은혜를 정밀하게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과 친밀하게 일대일로 동행하며 순종하지 않고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 은혜의 핵심적인 특성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치러야 했던 진짜 시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어야 할 기회임을 미처 모르고 허사로 만들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는 일을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하는 양, 아니면 하나님은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실 것이라고 교만해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그런 그를 가나안 땅에 도무지 들여보낼 수 없었습니다. 모세 개인에겐 가혹해 보여도 백성들을 생각해서 지도자에게 본이 되는 징계를 내려야 했습니다.
이제 들어가 살 땅인 가나안의 신들은 전부 신자들의 열성과 정성에 비례해서, 다른 말로 인간이 조종하는 대로 따르는 신이지 않습니까? 모세가 반석을 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왜곡, 불순종할 여지가 생기는 곳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명령을 형식만 갖추어 문자적으로 순종하면 자동으로 복 주실 것이라고 착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이스라엘은 제물 숫자만 채우려고, 아니 좋은 것은 자기들이 먼저 차지하려고 흠 있는 제물도 바쳤지 않습니까?
모세는 개인의 믿음보다도 지도자로서 참 순종의 본을 보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만을 위해 개인적으로 마려한 광야 지도자의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런 가장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모세의 여동생 미리암을 데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그로 상심에 빠지게 한데다, 그런 상황도 아랑곳 않고 백성들로 불평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모세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게 만든 셈입니다. 모세로선 그야말로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시험, 아니 덫(?)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군들 이 시험을 쉽게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짜 시험은 바로 이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말을 그대로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만 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여건을, 필요하다면 엄청난 환난을 주어서라도 도무지 순종할 수 없을 만한 상황에 밀어 넣고선 순종하라고 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더러 여동생이 죽었던,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아랑곳 않고 자기를 죽도록 괴롭혀도 당신만 따르려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악에 취해 미쳐 돌아가고, 믿음의 사역은 하나의 결실도 맺지 못하는데다, 개인적으로도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어도, 참 지도자라면 하나님 당신께 죽도록 순종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천하가 다 없어져도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한지에 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세를 향한 시험은 이 단계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갔습니다. 이 사건이 마무린 된 다음에 하나님이 그와 아론 즉, 백성의 지도자들을 야단치는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절)
우선 모세와 아론 두 지도자들더러 당신을 믿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일차적 이유는 말로만 명하라고 했는데 지팡이로 두 번 쳤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의 말을" 따르거나 믿지 아니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러지 않고 ''당신을" 믿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약속보다 당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야단친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데 필수 요소는 약속을 한 당사자가 믿을만하지 여부이지, 약속의 합리성 타당성 가능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반석에서 물을 낼 능력이 없음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40년 전에도 똑 같은 상황을 겪었기에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당연히 오늘날의 모든 신자도)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 응답해 주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은 믿고 있습니다. 기적도 일으킬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에게 야단치는 말씀에 비추면 하나님은 우리가 갖는 그 정도의 믿음은 믿음도 아니라고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어떤 것이 믿음이 됩니까? 지금껏 살펴본 대로 아무리 힘들고 억울한 경우에 처해도, 온 천지가 다 망해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대로만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실 것이 자기 힘으로는 전혀 조달될 수 없는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일지라도 오직 하나님 뜻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생명을 비롯하여 자기 전부를 다 내려놓더라도 여호와의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시험한 또 다른 이유
더욱 놀랍게도 온전한 믿음은 전적 헌신과 순종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신자가 힘들어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는 자기의 잘남보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사건에서 보여준 모든 말이나 행태는 도무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려는 열의나 소망은커녕 아예 그런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고 백성들에게 자기가 한 번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뜻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당신께선 십자가에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뤄지길 소원, 아니 실천해야 합니다. 에스더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시면 기꺼이 죽더라도 자기에게 맡겨진 민족 구원의 소명은 이루겠다고 담대하게 세상의 통치자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이를 시켜서라도 그 일을 이루시지만 순종하지 않은 자는 그분의 엄중한 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모세를 지도자에서 파면시켰습니다.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은 자기 생명까지 그분께 완전히 의탁할 수 있는 절대적인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세상과 사람이 괴롭히더라도 오직 그분 한분만으로 족하는 믿음입니다. 거기다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자기를 통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합니다.
생명까지 맡기는 절대적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이라고 오인해선 안 됩니다. 순교하면 천국 보상이 따른다고 믿고 그 보상만 바라고 순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종교적 열성만으로 순교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분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가릴 수도 있습니다. 자기야 어떻게 되든 그분의 영광만 드러나길 진심으로 소원하는 자는 순교가 두렵지 않고 기꺼이 당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럴 때만 실제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를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며 죽어야 합니다. 일반 신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위해 한 번만 죽으면 되지만 지도자는 하나님과 신자를 위해 두 번 죽어야 합니다. 아니 자기가 목양하는 신자의 수자만큼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닥치는 사건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지도자는 죽고 또 죽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투정을 해도, 온갖 음해를 해도, 심지어 금전적 손해와 직접적인 박해를 가해와도 죽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세상에서 대우받고 현실적 업적으로, 종교적 업적이라도, 칭송받는 반면에 자기는 아무 이름도 빛도 없이 죽임을 당해야 할지라도 그래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100%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특별히 지도자가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해야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뤄질 것 아닙니까? 그런 죽음의 순종 가운데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길 소원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전부를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광야 40년의 믿음의 훈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모세가 도달하길 바랐던 믿음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당신과 대면하여서 직접 교통했던 사이임에도 그러합니다. 가나안 땅이 멀리 바라보이는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할 때에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았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모세마저 메우지 못한 엄청난 간격
모세가 실패했다면 우리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과연 자기를 온전히 죽일만한 소원과 열망이, 아니 믿음조차 있을지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모세를 야단친 것처럼 당신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까? 또 모세처럼 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모세는 단지 수명이 다함으로 가나안 땅에 입경만 못했지 따로 개인적인 큰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취소된 것도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변화산 상에 엘리야 함께 그를 데리고 나타났지 않습니까?
만약 다른 이가 하나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데다 당신의 목전에서마저 짜증과 분노를 드러냈다면 틀림없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벌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겐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모세에게 불평한 미리암은 그 자리에서 문둥병이 걸렸는데도 말입니다. 모세에게는 말로 야단치시고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이진 못해도 먼발치에서 보게 하셨습니다. 당신과 대면하여 친교를 나눈 모세를 크게 우대하고 사랑과 긍휼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음에도 "물이 많이 솟아나게"(11절) 했습니다. 말하자면 모세가 당신께 범한 잘못은 하나님만 알고 넘어가는 일로 처리했습니다. 백성들 앞에 지도자의 위신은 세워주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넘치도록 많이 솟아나게 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바위를 두 번이나 쳤지만, 하나님은 그마저 마치 정당한양 비춰지게 했습니다. 백성들로선 지금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불협화음, 심하게 말해 소통이 막히고 있는 것에 대해선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성들로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응답을 받아 지팡이로 반석을 쳤더니 그 많은 백성과 짐승들이 마실만한 물이 솟아났으니 너무나 신났을 것입니다. 역시 모세의 믿음은 자기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하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났고, 또 하나님도 역시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자기들의 간구나 염려를 들으시고 빈틈없이 보상해주신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좋아했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물론 모세에 대한 칭송도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만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에겐 믿음이 없으며,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의 거룩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그분의 거룩 함 사이에 도무지 메울 수 없는 이 간격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마저 메우지 못한 그 간격의 크기를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에게 바라는 것과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과의 엄청난 격차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만.....
그럼 우리는 하염없이 실망에 빠져 가만히 주저앉아 있어야만 합니까? 우린 모세 같은 지도력을 아예 발휘도 못해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도무지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아무리 커도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와 고통과 수치 뿐 아니라 우리의 무지함과 교만함까지 다 감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모세의 실망은 우리의 소망
십자가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분의 거룩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일을 함에 있어서 세상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실패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 순종을 잠시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낼 수단이 지팡이로 내리치는 힘에 있다고, 아니면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거나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 순종을 할 수 없었던, 신약 용어로는 예수는 십자가를 놓친, 것입니다.
모세의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신의 옛 자아가, 아니 지도자로서의 타성과 안일함이 튀어 오르는 것을 눌러 막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뿐입니다. 죄에서 구원 받을 때뿐만 아니라, 구원 후에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에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은 거룩한 자를 통해서만 이뤄지기에 그분의 일을 감당하려면 더더욱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은 더 그러합니다. 지도자가 전하고 가르칠 것은 십자가 복음뿐인데 스스로 십자가를 놓치면 아무리 신학적으로 심오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해 보이는 메시지라도 의미 없이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될 뿐입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해서 또 단순히 무조건 희생하고 손해만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개인의 십자가여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각 개인의 구세주이듯이 십자가도 개인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했지 않습니까? 자기 속에 남은 모든 상식과 고집과 편견과 교만을 깨어 없애야 주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위치에선 크게 잘못한 것 없었어도, 자기 개인이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로 서는 일에 실패하는 바람에 믿음이 없다고까지 야단맞았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일수록 주님과 일대일로 교통하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직접 대면은 아니라도 그분과 영적으로 대면하여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이들도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하고 인생을 변화시켜서 그 개인의 삶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을 프로그램이나 선물세트처럼 일괄적으로 포장해서 형식적으로 대량으로 나눠주어선 안 됩니다. 기독교 교세나 교회의 전체 교인 숫자를 자랑하는 일과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아니 어쩌면 아예 등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통과하는 일은 참으로 힘듭니다. 신자가 지고가야 할 짐이 무겁고 고달픈 것은 아닙니다. 일단 참 십자가를 지면 주님이 동행하시기에 가볍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주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주님도 당신의 멍에는 가볍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안식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정작 너무나 어려운 것은 우리가 십자가 앞에까지 자신을 끌고 가서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기까지입니다. 때로는 정말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내 것을 분에 넘치게 희생하며 주님의 일을 위해 성심껏 수고했는데도 돌아오는 것은 음해와 비방과 핍박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오는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그것마저 그런대로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때로는 너무나 비상식적이라 모세처럼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아니라 수십 번이라도 내려치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때입니다. 내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너무나 비상식적인 것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환경과 사건에 처했을 때에, 그것도 사방이 완전히 막히고 점점 더 옥죄어 올 때에 일담 멈춰 서서 그분께만 귀를 기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내 상식과 이성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방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그분과만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상식적인 분이라 비상식적인 요구를 밥 먹듯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초월 했기에 비상식적인, 즉 비상(非常)한 것입니다. 그분의 생각과 뜻은 우리의 그것과 너무 간격이 넓습니다. 또 너무나도 당연히 모든 문제에 대한 당신만의 비상한 해결책과 신비한 은혜를 예비해 놓았습니다. 인간의 비상식 속에서도 하나님의 상식을 발견해 내어야만 합니다.
그럼 우리가 대응할 조치도 비상(非常)한 것이어야 합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니까 말을 말고 비상하게 인내하며 그분의 거룩한 영광을 가슴 설레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이해 안 되는 비상한 반석을 자기 지팡이로 치지만 않아도 됩니다. 비상한 하나님의 가장 비상한 역사가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어떤 사건과 여건도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의 프리즘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 같은 실패도 주님만은 얼마든지 우리의 소망으로 바꿔줄 수 있습니다.
[출처:박진호 목사 홈페이지,http://whyjesuson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