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기승하고 있는 네오-몬타니즘에 대한 대응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필자는 지금까지의 논의에 기초하여 다음 네 가지로 바람직한 자세에 대하여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가장 절실한 것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교단적으로 권위 있는 이단분별위원회가 범교단적으로 구성되어 제 구실을 다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여러 신학교에서 영성과 학문적으로 권위가 있는 교수들에게 이에 대한 평가와 진단을 의뢰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일치된 결론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단 분별에 있어서 이제는 교회사적인 분별법을 활용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이 네오-몬타니즘을 평가하는 교회사적 분별의 잣대가 될 것이다; (1) 성경에 대한 자의적 해석, 심지어는 성경의 정신에서 벗어난 예언이나 계시를 말함 (2) 신유와 이적 등의 '성령의 나타남'을 매우 강조함 (3) 분파주의적 교회론으로 빠져 들어갈 위험성 (4) 금욕주의나 극단적인 형태의 신비주의를 도입할 가능성 (5) 임박한 종말론적 메시지 강조, 심한 경우에는 시한부 종말론으로까지 발전.
필자는 교회사적 분별을 통해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게 네오-몬타니즘 성향의 특성이 이들에게 어느 정도 심각성이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각 교단 교리나 신학의 입장에서만 이단 여부를 다루는 방법은 당연히 교파 간에 균열과 이견을 일으켜 합치된 결론을 얻는 데 도움이 못 된다. 그러나 교회사적 분별법을 사용하면 교단 신학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일치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게 된다.
결국 검증 받는 대상자에게 교회사적 분별법을 통해 복음적 잣대를 제시함으로서 전향할 여지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단 정죄나 배척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잘못된 점을 깨닫고 정통적인 신념 속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 길을 촉구하고 안내하는 것이 우선 급선무이다. 그리고 전향을 하지 않는 경우라도, 교회사적인 분별에 의한 잣대는 어느 교단의 교리, 어느 신학 노선에도 서로 충돌되지 않고 공통적으로 공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단 간의 이견 때문에 힘이 분쇄되는 것이 아니라, 온 교계가 힘 있게 이단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네오-몬타니즘에 대한 대응의 또 한 자세로서, 체험과 현상을 과도히 자극하는 영성운동은 경계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이 부여될 때 육감적 체험과 현상적 차원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나 현상이 성령의 권능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 영혼의 본질에 접근하여 본질적인 회복과 변화 그리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능은 권능 받은 이후의 삶과 사역을 통해 뚜렷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적 차원은 현상 그대로 끝나는 것이지, 거기에 필연적인 본질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셋째, 영성운동의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지혜가 필요하다. 신학적으로 공인하는 '계시'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전 인류의 구원과 창조의 질서에 대한 초시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진정한 계시는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물론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개인적인 인도하심과 진리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현상을 '계시'라고 표현해서는 안 되며, 또 각자에게 주어진 이 같은 깨달음이나 인도하심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예언'이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그렇다. 근본적으로 볼 때 은사주의자들과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의 예언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예언을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볼 수 있는 성령의 나타남의 해석학적 관점으로 국한시켜 본다면, 은사주의자들이 '성령께서 이런 예언을 주셨다'고 표현할 때,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주께서 이런 감동을 내 마음에 주셨다'고 표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간의 차이점은 은사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 표현상의 차이에서 나타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넷째, 네오-몬타니즘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복음적 교회론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 여러 영역에서 이단 판정을 해 왔으나, 사실상 이단 결정의 최종 잣대는 언제나 교회론적인 문제였다. 교회와 목회자들을 갱신시키겠다고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깨는 일은 교회론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개신교 교회론에 있어서 일치성에 관한 내용은 가톨릭교회의 교회론과 비교해 볼 때 늘 약점을 지니고 있는 요소로 지적되어왔다. 필자는 종교개혁의 '구원의 참 신앙'의 정신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교회론의 일치성의 근거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갱신을 추구하는 일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가 지나친 나머지, 사랑 안에서의 공동체의 일치성을 깨트리고 독선의식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 교회는 새로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 이 같은 극단적 갱신주의 정신이 가져다주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의 기준에 있어서 주관적 체험보다는 성경의 교훈을 더욱 신뢰하는 일이며, 그리고 교회생활에 있어서 독선적 소그룹을 만들기 보다는 교회의 질서에 더 잘 순응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다 성경적 교회 갱신의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교회의 유기적 통일성 속에서 독선에 빠지지 않는 지혜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복음적으로 갱신시켜 나가는 지속적인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