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목할 만한 것은 늦은 황혼의 이혼이다. 과거에는 결혼 초반과 중년만 잘 넘기면 싫어도 포기하고 살기 때문에 이혼까지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노년 이혼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늘고 있다고 한다. 과거 같으면, 자식들 시집 장가만 보내면 헤어진다고 말은 해도 실천까지는 못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그것을 조금씩이나마 실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늦은 이혼의 대부분은 여성의 희망사항에서 시작된다. 나이가 들면 여성들은 혼자도 잘 사는데, 젊어서 밖으로 돌던 남자는 여자만 졸졸 따라다니고, 끼니마다 밥 챙겨줘야 할 대상이 되어버리니 대세가 여성 쪽으로 기울어 남자들이 독선적으로 살아온 과거의 역습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삼시세끼를 따박따박 집에서 먹는 남편을 '삼식이'라고 한단다.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늙은 남편을 '젖은 낙엽'이라고 하는데, 비 온 뒤에 떨어진 낙엽은 바닥에 들러붙어 아무리 쓸어도 꼼짝 않기 때문이라나? 또 이사를 가는 날에는 남편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는데, 이삿짐 차량 조수석에 일찌감치 가서 앉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을 버리고 이사를 가 버릴까 봐....
이런 조크의 진원지는 일본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우리와 민족적 기질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 사회가 겪는 경제 상황은 물론 다양한 병리학적 현상을 미리 앞서 겪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일본의 사회 현상을 10-20년 후에 우리 사회가 겪는 일도 많다고 한다.
솔직히 평생 밥해준 남편을 늙어서까지 매번 챙겨주느라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얼마나 싫을지 알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귀찮을 텐데 평생 자신을 구박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안 하던 잔소리는 늘고, 하는 일마다 밉상이라면.... 게다가 여자도 이제는 생활할 능력이 충분하고, 운전도 할 줄 알고,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면, 애 하나 돌보는 품이 드는 남편이야말로 비로소 얻은 자유에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남자가 매번 아내에게 밥을 달라진 않겠지만 여성들은 자신만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는 자체에 심적 부담을 많이 느끼는 모양이다.
약 20년 전, 우리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암 발병 후 한 달 반 만에 59세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슬픔은 무척 큰 것이었고 눈물도 오래갔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늘 신사적이었고 큰 배려를 할 줄 아는 좋은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위로하러 온 친척 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버지와 5살 차이였으니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여자는 늙어서 혼자되면 편한 거고 남들은 부러워하기도 한다며 너무 걱정 말라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가 아는 분 이야기를 했는데, 늙은 남편이 죽자 사람들 앞에서는 곡을 했지만 아무도 없는 방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오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자랑하듯이, "야!! 나 과부다!! 나 이제 과부야!!" 하더라는 것이다. 일생에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로또가 따로 없다.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로 위로하러 온 분을 오히려 위로한 것이지만, 살 만큼 산 남편과의 이별은 몇 가지 아쉬운 것만 빼면 여성의 삶의 질이 더 나아지는 기회(?)일 수도 있다. 여성들이 힘들다는 이유로 남편을 떼어버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그런데 황혼 이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젊어서는 남자의 그늘이 필요할 때가 많다. 여자 혼자 살면 남들이 우습게보고, 각종 대소사도 혼자 해내려면 서럽고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돈만 어느 정도 있으면 된다. 이혼을 해도 그 정도 돈은 위자료와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보조금 등으로 충당할 수 있고, 자식들이 남편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대개 이혼하면 자식들은 일생 고집불통 또는 소통 부재로 이 사태를 만든 아버지를 원수로 알거나 이혼의 원흉으로 여기기 때문에 거의 엄마 편이다. 그래서 이혼하는 황혼 남성들이 더욱 절망하는 이유는, 아내만 잃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을 잃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식들은 상대적 약자이면서 더 오래 시간을 보낸 엄마 편에 서기 마련이다. 아빠가 고생한 것을 알지만 돈이 다가 아닌데 늘 일에 빠져서 얼굴도 보기 어려웠고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또 폭언과 폭력도 있었을 수 있다. 특히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용서가 안 된다. 아내에게 어려서부터 밀착된 자녀가 있다면 남편은 더더욱 필요가 없어진다.
이혼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변 이야기이다. 황혼 이혼 문제에 관한 뉴스만 봐도 그것을 남들도 많이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혼에 관대해지기도 한다. 자식이나 친구나 상담자들은 이혼을 얼마든지 가능한 하나의 결정으로,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는 한 방편으로 추천하기 쉽다. 그러면 당사자의 죄책감이나 사회적 부끄러움이 줄어들어 이혼은 훨씬 쉬워진다.
그러나 부부는 한 몸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혼만은 피해야 한다. 크리스천도 이혼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다. 지금도 교회에서 최소한 이혼을 권하거나 상담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와 만나고 영향을 받는지는 건강한 삶을 위해 무척 중요하다.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60대는 노년이 아닌 '신중년'이라고 할 정도로 수명이 늘었다지만, 그것은 저물기 시작하는 삶에 대한 위안임을 누구나 알 것이다. 힘들게 버텨 온 삶을 모르고 무작정 같이 살라고 아무도 함부로 권유할 수는 없겠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사실 인생은 한 번 더 생각하기의 연속 아닌가. 그리고 일을 저지를 때보다 한 번 더 생각할 때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남성들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젊어서는 풍족하게 벌어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죽도록 뛰었는데, 늙고 나니 '돈이면 다냐' 하면서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가족에 대한 마음과 자세를 지적받아 억울할 수 있지만 그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족들의 불만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부모의 이혼을 부추기는 것은 빛만 취하고 그림자는 떼어버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자가 노년이 되면 여자에 비해 짐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물건이 사라져도 아직 할부금이 남을 수 있듯이 사람을 감당하는 일은 두부 자르듯 단순하지 않고, 이별 뒤에는 늘 많은 빚을 남기는 법이다.
3
이혼은 언제 해도 짐이 되는 일이다. 배우자였던 사람이 누구였든지 그것은 자기 선택이었다. 아무리 잘못된 선택이었어도 그것은 결혼하는 순간 정답이 된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떤 약속이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는 방법이다. 각자 결혼을 소홀히 여기고 역할을 다하지 못한 부분은 반드시 판단하시겠지만 그보다 중히 보시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9:6)
결혼을 서약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 둘을 법적 관계, 혼인신고보다 훨씬 엄중한 계약 관계로 보신다. 하나님의 기준이 그리 간단히 해제된다면 우리의 구원이나 천국이나 말씀에 대한 약속들은 보장받지 못하는 보험금이 되고 말 것이다. 배우자의 폭력과 일탈 등 이혼 사유가 충분한 일도 있고, 개인의 자유를 비난할 수 없으며,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지만 원칙이 그렇다.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 만큼 심적 부담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짐이 될 거라는 뜻이다.
이혼에 대해 사람들은 말한다. 아주 조금밖에 안 살았으니 거의 미혼이나 다름없다든지, 할 만큼 했고 자식들도 다 컸으니 흉이 되지 않는다든지 하면서 이혼을 감행하는 자격의 등급을 매긴다. 그러나 이혼은 언제 해도 똑같다. 최소한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의 이혼을 부추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혼은 도미노처럼 다른 불행과 다른 이들의 파경에 영향을 미치고 모든 종류의 관계 단절과 분열로 연결된다. '늦은 이혼'은 말 그대로 이미 늦은 것일지 모른다. 이혼이 절실한 사람이라도 내일로 미루고, 또 내일로 미루고...,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하며 하늘을 소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결혼이 지옥이나 무덤이 된 이들의 고통을 잘 알면서도, 감히 그렇게 생각해 본다.
[출처: 기독교작가 김재욱블로그, http://woogy68.blog.me/140197924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