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기독일보가 주최하고 UBM교회가 주관해 열린 ‘구약에서 길을 찾다’ 에세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최재환 학생(게이트웨이신학교 M.Div.)의 글 <이스라엘신학 정립의 필요성과 유용성에 관하여>를 네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스라엘신학의 필요성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야웨의 특별한 파트너로서 이스라엘이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성경 안에서 살펴보자. 구약의 몇몇 전승들 안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소명과 목표의 일부로서, 세상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다음의 세 본문은 이스라엘이 모든 세계의 운용과 복리를 위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첫째, 시내산 만남의 자리에서, 야웨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정말로 온 땅이 내 것이지만, 그러나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요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이라”(출 19:5-6). 여기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놀라운 소명이 전달된 것이다. “제사장 왕국”이란 이 표현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정확히 규명되고 있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하지만, 문맥을 고려하여 예측할 때 아마도 이 나라는 다른 나라들을 위해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다른 나라들의 복리를 위한 “중재자”이자 “중보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땅의 모든 나라들 역시 야웨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야웨 하나님은 “온 땅이 나의 것”이라고 확실히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제사장 역할은 세상 속에서 복리와 치료가 가능하게 하는 역할과 함께 궁극적으로 야웨와 모든 나라들 간의 참된 교제를 가능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함께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아브라함의 이야기 즉, 창세기 3-11장의 이야기들을 통해 먼저 세상이 야웨의 신실하신 피조물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예측해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피조세계가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저주의 세계가 되게 된 방식에 대한 신속한 서술 이후에 갑자기 시작되고 있다. 그래서 한스발터 볼프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해 이것은 세상의 반역에 대한 야웨의 반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한 야웨의 부르심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창세기 안의 이야기 속에서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은 세상의 위기, 즉 온 나라가 야웨의 주권 가운데 계시는 세상 속에서 따라야 할 자신들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위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존재의 한 이유는 온 피조세계가 불순종으로 인해 저주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야웨는 세상이 복을 받아야 한다고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삶은 세상의 회복을 위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셋째, 만국에 대한 회복의 전달자로서의 이스라엘이란 주장과 관련해서, 야곱기사를 말하고자 한다. 애굽의 국무총리 요셉의 아버지이며, 복의 전달자인 늙은 노인 야곱은 마침내 당시의 만국을 상징하는 바로 왕과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 기사에서 야곱은 탄원하는 자였고, 바로는 나누어줄 자원들을 갖고 있는 자로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야곱 기사는 이런 관계를 간결하게 역전하며 늙고 힘 없는 야곱이 만국의 왕 바로를 축복하게 된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리니(창4:7,10)” 결론적으로, 바로는 이스라엘이 소유하고 있는 생성력 있는 삶의 능력의 수혜자였고, 이 능력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고, 요셉에 의해 실행된 삶의 능력이었다. 비슷한 예로, 출애굽기 12장 29-32절을 살펴보면, 주인이었던 바로 왕과 노예 모세 사이의 일반적인 힘의 배열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를 볼 수 있다. “너와 이스라엘 백성들아, 일어나 나의 백성들로부터 떠나거라! 네가 말한 대로, 가서 야웨께 경배하라. 네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소떼를 취하여 가라. 그리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출 12:32)” 지금까지 모세와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속이려고 해왔던 바로는 이제 자원이 완전 고갈된 자가 되어버렸고 오히려 노예 모세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40-55장의 본문을 살펴보자. “내가 너를 백성들에게 언약으로 주었고, 열방들에게 빛으로 주었으니, 이는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기 위함이라(사 42:6).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회복시키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이 본문에 따른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무는 만국들에 대한 하나의 책임으로 제시되고 있다. 포로기의 이사야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임무는 확장되어서 온 인간 세계를 야웨의 주권과 관심의 대상과 영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의 언약과 열방의 빛”이란 두 표현은 일반적으로 야웨 통치의 좋은 소식을 이방 세계에 알림으로써 그 결과, 이방 세계 역시 구출되어 구원받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러한 해석에 따라 비유대국가들의 복리까지도 이스라엘의 삶과 사역에 맡겨져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신학 이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 구원 계획의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파트너이자 대리자로서 세상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필요성과 역할에 대해 올바로 정립하고 알려주는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그 도구로서의 역할이 신약의 시대의 도래로 인해 끝이 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은 영원한 약속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시 땅을 가진 한 나라로서 독립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의 때가 점점 차고 있으며, 대체신학의 문제점들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역사의 흐름 등을 우리는 결코 가볍게 보아선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신학이란 개인적인 구원에 더 많이 치중해 있는 현대 교회 신앙과 신학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구약의 역할을 신약의 완성을 돕기 위한 축소된 역할로서의 도구로 인식되는 풍토는 이제 그만 지양되어야 할 요소로 보인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서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고 궁극적인 하나님 계획의 완성을 이룬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중요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전세계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더 많은 집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계획이란 원래의 틀 안에서 기독교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진리를 넘어서,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란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기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도래가 아니라 야웨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신학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특별한 파트너로서 이스라엘이 수행했던 그 역사적 증언들을 의지하여, 이스라엘 자신의 회복을 도모하고 또한,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 받은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신학으로 인한 유용성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만들어냈고 그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언약이란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나 두 가지 종류를 포함해 왔다. 하나는 야웨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고 신실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자신들의 내적인 삶을 경건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을 넘어서 밖에 있는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야웨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들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라는 임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고 나아가 열방에게도 그들이 받은 복을 전달해야만 하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항상 두 청중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을 제 1공동체로 보았을 때, 제2의 공동체는 이스라엘을 통해 수혜를 받게 되는 열방인 것이다. 열방은 야웨 하나님의 다스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토라에 기초한 제 1공동체 이스라엘에 초대함을 받게 되는 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편 96편 10절에 나타나는 “복음”의 의미는 “열방들”을 향한 구원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흐름 안에서 실행되어지도록 의도되었다. 이 약속들의 핵심은 평화, 정의, 안정, 풍요와 관련되어 있다.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이스라엘의 이 예언적 약속들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이 약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미래 구현은 파트너인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을 성경 안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창세기 12:1-3은 모든 민족이 받을 복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야웨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란 인류를 위한 복을 의미하며, 이러한 목적 안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을 다스리거나 압제하고 또 그들을 쫓아내거나 그들을 진멸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했었고,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중재해야 하는 역할도 수행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중재했고(창18장), 모압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의 조상들을 위해 중재했다(창19:37). 롯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땅의 선택권을 위임 받았으며(창13장), “블레셋 사람” 아비멜렉과 이삭은 “계약”을 체결하고 평화롭게 공존했다(창26:38-31). 아람/시리아 사람인 라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창 30:27). 야곱과 에서는 화해했고(창 33:1), 이집트는 요셉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창 41:49,57).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족장들과 그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모압, 암몬, 에돔, 아람,블레셋, 이집트, 헤브론의 헷 족속(창 23장) 등이다.
아브라함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유랑자로 살고 있는 각 족속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서 아브라함의 민족이 세상의 유익을 위해 지어졌다는 것은 근본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부르심은 선교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세계를 이전의 에덴 동산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2장 1-3절은 모든 이스라엘인의 시초론 중의 시초론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서 일으키실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전 인류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