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중에 가장 유명한 사건을 들으라면 오병이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아이가 갖고 있던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만 5,000명이 넘게 배부르게 먹이신 이 기적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잘 아는 사건입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이 표적의 의미를 단순히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을 배부르고 기분좋게 했다! 정도로 축소 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당시에 사람들도 했었으며 예수님은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왕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시고 나무라시기 까지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걷는 기적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거나 쇼를 하신게 아닙니다. 그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복음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5장이 유대인의 명절에 일어난 사건이었던것 처럼 6장이 유대인들의 명절 유월절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벌어진 7장의 사건과 함께 유대 절기의 참 의미를 깨우쳐 주시기 위한 것임을 인지하고 본문을 읽어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는데,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5장에서 기적이 아닌 말씀을 봐야 한다는 예수님의 강해에도 사람들은 각 표적의 참된 의미인 영생의 메세지 대신 자기의 눈에 신기하고 이 땅에서 당장 도움이 되는 기적에 주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더 심해 집니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오해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강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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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요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로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그 양식을 위해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그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봉인하셨느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26~27> 

 

다시 얘기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세상의 떡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재밋는 것은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스스로를 하늘의 떡으로써 이 세상에 만족을 위해 온것이 아님을 나타내자,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랐던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 입니다.

우선 처음에 말씀드린 유월절에 대해서 언급을 하자면 요한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켜 복음을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이 두 표적을 본 사람들 역시 이를 출애굽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진실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라고 얘기하는데, 이는 모세가 신명기에서 얘기한 대언자 곧 그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 입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 <신명기 18:15>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통해서 인간의 타락 이전의 에덴 동산에서의 삶을 꿈꿨었고, 출애굽이 그들의 꿈을 이뤄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듯이 자신들의 타락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제 2의 출애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이 예언을 근거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와서 제 2의 출애굽을 재현할 것이라고 보고 그 대언자는 다윗 왕국과 같이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시간적 배경을 보면,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장소적 배경을 보면, 요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사건이 빈들이라고 밝히는데 빈들에 사용된 헬라어는 에레모스(Ἔρημός) 즉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이신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인 사건을 연상하게 되고 이 표적으로 보고 예수님이 바로 그 대언자라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던 것 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걸어가시는 사건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맞물려 유대인들의 생각을 공고히 해줬을 것 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예언을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그 대언자이심을 알아차렸는데 한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그들은 메시아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단 것 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영원히 세울것이라는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도 예수님의 표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분처럼, 나에게 돈을 주시고 좋은 성적이 나오게 해주시고,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우리들의 이런 오해가 결국 나와 하나님을 멀어지게 만드며 제 주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왕 삼기 위해 예수님을 찾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산으로 떠나십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만난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으시고 매몰차게 이들의 잘못된 의중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썩어 없어질 이 땅의 양식이 아닌 영원한 하늘의 양식을 위해서 수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요? 어떤 수고를 할까요? 라고 묻자 착한 일을 하여라, 다른 사람을 도와라, 금식해라, 헌금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어라!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반복하고 반복해서 자신이 생명의 빵이며 자신을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번째로 위에 설명드렸듯이 홍해를 건너가게 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써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역시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 받을수 있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은혜로 얻어지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어부로써 수십년간 배를 몰아온 전문가들 입니다. 그런데 날이 어둡고 큰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심해지자 바다 위에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오시는 것을 보자 두려워 하지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자 반갑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배가 곧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능력이나 능숙함이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할 때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 즉 천국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 하십니다. 또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이 바다에 빠질 위기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을수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셔 말씀하실때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을 알아보는 자들이 영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정론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을 하시는데, 말씀은 분명하게 인간에게는 구원의 좁은 길을 스스로 알아 믿을 능력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따른 것임을 알려줍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6:44>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도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65>

이는 5장에서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듣는 자들이 살 것이라는 말씀 즉 어떠한 의지나 의식도 없는 죽은 자들이 사는 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시고 음성을 듣도록 해주시는 것에 달려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 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실망해서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소원 성취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정의가 회복되지 않는다고 느껴지고 내가 바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의 비젼이 무엇인지에 전혀 관심이 없이 나의 꿈, 나의 소망, 나의 비젼을 위해 살다가 예수님이 아닌 무당이 그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고 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맡기지 않은 자들 입니다.

하나님 처럼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꿈과 위치가 위협 당하면 2세 이하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인 헤롯처럼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의도를 갖는 죄인 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루어 줄 것 같아서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것을 이뤄줄 의향이 없음을 확인하자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 일들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인들의 거주지에서 다니려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더라. <요한복음 7:1>

요한은 5장의 안식일, 6장의 유월절에 이어 7장과 8장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해서 동일한 메세지 즉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오해하는 이스라엘을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메시아가 아니라 초막절이 상징하고 있는 구원을 완성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7장과 8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막절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 남성들은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는 성전에 나가야 하는데, 이는 출애굽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 절기들을 통해서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구원의 역사에 감사하고 이 출애굽이 가리키고 있는 진짜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소망하라고 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하나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율법을 준수하는 의미로써만 절기들을 지켜 왔습니다. 이는 마치 선생님께서 오늘 배운 것을 다시 생각하고 이해하라고 숙제를 내주셨는데, 배운 내용에 대한 이해에는 관심도 없이 전과에서 답만 베껴서 숙제를 제출하는 학생과 같은 것 입니다.

초막절은 이름 그대로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살던 때를 기억하라고 해서 주어진 절기 입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것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그들로 하여금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세대들이 알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위기 23:42~4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초막절 기간에 3가지 의식을 행해야 했는데, 첫번째로 일주일 간 텐트를 치고 사는 것입니다. 텐트 특히 성막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합니다. 두번째로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서 성전을 제단에 부어서 성전 제단에서 물이 흘러 넘치게 해야 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반석의 생수로 먹이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초막절 기간 동안 성전에 커다란 촛대를 세우고 그 불을 항상 밝게 켜야 했습니다. 이 역시도 광야에서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광야에서 자신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초막절이 이 상징적인 행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장막을 치신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구절 중 거하신다라는 단어의 원어는 스케누(σκηνόω) 인데, 이 단어는 장막을 치다 텐트를 치다라는 의미 입니다. 우리를 저주 받은 이 땅에서 끝까지 보호해 주시는 참장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탄의 어떤 공격으로 부터도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1:3~4>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모든 눈물과 저주가 사라지는 천국에서의 삶을 초막절이 담고 있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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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성전 제단에서 흘려 보내야 했던 실로암 연못의 물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므리바에서 반석의 물은 물이 없어서 죽을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에게 부어질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 <고린도전서 10:4>

그 뒤에 그가 다시 나를 데리고 그 집의 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그 집의 문지방 밑에서부터 물들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더라. 이는 그 집의 앞면이 동쪽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더라. 그 물들이 그 집의 오른쪽 곧 제단의 남쪽 편에서부터 내려오더라. 그때에 그가 나를 북쪽을 향한 문의 길에서 데려다가 바깥 길로 인도하여 동쪽을 바라보는 길 옆의 바깥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거기서 오른쪽에서 물들이 흘러나오더라... 그때에 그가 내게 이르되, 이 물들이 동쪽 지역을 향해 흘러나와 사막으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가리니 그것들이 바다로 들어갈 때에 그 물들이 치유되리라. 그 강들이 이르는 곳마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살고 또 물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는 이 물들이 거기에 이르므로 그것들이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라. 그 강이 이르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살리라. 또 어부들이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그 강 위에 서리니 그 지역들이 그물을 치는 곳이 되리라. 그 지역들의 물고기가 그것들의 종류대로 대해의 물고기같이 심히 많으리라. 그러나 그 지역들의 수렁과 늪지대들은 치유되지 아니하고 소금에게 넘겨지리라. 또 그 강가의 둑 위에는 이쪽과 저쪽에 먹을 것을 맺는 모든 나무가 자라되 그것들의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것이 자기의 달들에 따라 새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물들을 성소에서 내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의 열매는 먹을 것이 되며 잎사귀는 약이 되리라. <에스겔 47:1~12>

잘 읽어 보시면 성전에서 흘러 넘치는 물이 만물을 살리며 흐릅니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래서 7장 37절에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자신이 초막절의 주인이며 완성이심을 밝히시는 것 입니다.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7:37~38>

우리가 그냥 읽었을 때 뜬금없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말씀이었던 것 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실로암에서 물을 떠다가 성전에 붓고 있었을 것 입니다. 주님은 그 앞에 서서 이 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들에게 너희들 절기를 지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마셔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고 계신것 입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 모든 것이 천국에서 완성되어 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을 내게 보여 주니라. 그 도시의 거리 한가운데와 강의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그것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고 달마다 자기 열매를 냈으며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

에스겔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들이 등장해서 설명합니다. 그게 바로 새하늘과 새땅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어 있음을 요한이 알려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초막절에 성전을 밝히던 촛불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2>

이 말씀도 아무렇게나 뜬금없이 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밝히는 가득한 촛불 앞에서 저 촛불의 실체가 나라고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9장에서 생명의 빛으로써 날 때 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고치시는 것 입니다.

나 주가 의 안에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붙잡고 너를 지키며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인들의 빛이 되게 내주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며 갇힌 자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오고 어둠 속에 앉은 자들을 감옥 집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 42:6~7>

이 역시 요한은 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완성하신 빛에 대해 기록 합니다.

그 도시는 해와 달이 안에서 빛을 비출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었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땅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1:23~24>

이렇게 초막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이 됩니다. 이는 오병이어의 표적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단순히 기적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당시 예수님을 찾아온 이스라엘 사람들 처럼 다시 한번 떡을 주세요! 다시 한번 기적을 일으켜 주세요!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어지러운 이 세상 조율 한번 해주세요! 라고 예수님께 부탁하라고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영생에 관한 것이며 천국에 관한 것이며 사도 요한은 이미 이 완성을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갖도록 해줍니다.

이제 여섯번째 표적으로 넘어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과 말씀들이 영생에 대한 것임을 명확하게 하는 구절 두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24>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그인 줄을 알며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내가 이것들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8:28>

네번째 & 다섯번째에 대한 정리

  • 오병이어의 표적은 유월절 근처에 있었던 사건으로써 모세가 주었던 만나와 대비되는 영생을 주는 하늘의 빵이신 예수님에 대한 표적 입니다.
  •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풀어주고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세가 얘기하던 모세와 같은 대언자라는 것을 깨닫고 왕을 삼으려 했지만, 하늘의 떡이 아닌 이 세상의 떡을 바라던 그들의 왕이 되기를 거절하시고 이 표적이 영생에 대한 것임을 계속해서 강해 하십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꿈과 비젼을 하나님에게 내어드리려 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을 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예수님께 남았던 이유는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7장에는 초막절에 있었던 에피소드 들을 통해 초막절이 나타내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완성을 성경 독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 초막절에 사람들은 실로암 연못물을 성전에 부어 흘러 넘치게 했었는데, 예수님은 므리바 반석의 생수, 즉 성전에 넘쳐 흐르는 실로암의 연못물이 자신을 나타내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며 나에게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 또 초막절에는 성전 안을 가득한 촛불로 밝혔었는데, 이 빛 또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빛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임을 강해 하십니다.
  •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들고 나서야 깨달을 것이며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표적들이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나 건강이나 평화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임을 확증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