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던 시절, 제 또래의 아이들 책상 앞에는 으레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내가 얼마나 쓴지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런 경구(警句)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내는 정말로 씁니다. 곰의 쓸개만큼이나 씁니다. 인내는 밖에 나가 놀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유혹들이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삶”은 웬만한 인내가 아니면 일궈낼 수가 없습니다. 원수에게 이를 이로 갚지 않고 눈을 눈으로 갚지 않기 위해 참아내는 인내의 쓴 맛은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혀를 깨물어 피를 삼키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참아내는 인내의 쓴 맛도 아무나 맛볼 수 없습니다. 인내는 정말로 씁니다.
그토록 쓴 인내를 끝까지 뱉어내지 않고 꿀꺽 삼키는 사람에게는 어떤 열매가 맺힐까요?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훗날 출세해서 좋은 직장을 얻는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열매는 요약해서 말하자면 “인생을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사는 인생”은 언제나 경제적 수입, 사회적 직위, 의식주의 질, 또는 출신학교와 거기에서 얻은 학위로 해석되었습니다. 그것이 정답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인내의 열매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그의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야고보 선생은 왜 우리가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지 그 정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온전”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스”인데 인격적인 성숙에서 오는 온전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성숙한 인격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48).
참고 인내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밑도 끝도 없이 모함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인내하는 일,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기 위해 인내하는 일,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등등, 모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입니다.
그런데 계속하여 인내하다보면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말이 통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내의 가장 큰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