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목요일에 노회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느 목사님 전화벨이 울렸다. 목사님 교회 한 학생 부모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이가 가출을 했다는 게다.
왜일까? 수능시험 결과를 받고 낙담되어서 그렇게 한 게다.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목사님도 안타까워서 '돌아오겠지? 돌아올 거야!'라며 되뇌었다.
요즘 사람들마다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죽으려 해도 약 살 돈이 없어 못 죽는다'는 한 마디가 요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전해주는 것 같다.
더구나 작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판 이야기는 절망 그 이상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톱뉴스로 다루고 있지만 시민들은 진절머리를 낸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들 한다.
지난 토요일 교회 청년 결혼식이 있어 주례를 하게 되었다. 여전도사님과 권사님 한 분, 집사님 한 분이 함께 동석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정치판 이야기가 나왔다.
권사님이 자기 구역 식구가 교회 앞에 있는 시장 떡집에서 5-6년 직원으로 일했는데, 최근에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가게가 너무 어려워서 월급을 못 받게 되고,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는 게다. 그러면서 촛불집회 때문에 경제가 이렇게 어렵다고 불평했다. 그러면서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야단법석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집사님이 말했다. "요즘 텔레비전을 봐. 누가 박 대통령이 잘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지." 권사님이 다시 말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 그러나 자기네들은 다른가?" 듣고 있던 내가 한 마디 던졌다. "그만 두세요. 서로 싸움만 될 뿐이에요. 요즘 촛불집회 때문에 교회가 분쟁이 되는 일들이 허다하대요."
이 민족이 걷고 있는 행보가 너무 안타깝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비통하고 속상하다. 사실 현실을 보면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절망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게 아닌가?
사실 '절망적인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절망하는 마음'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 절망을 보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믿음으로 무장'하는 것이리라.
낙담과 절망이 짙게 깔린 유대 땅 베들레헴. 거기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짐승이 거하는 구유에 뉘이셨다. 이방 침략으로 얼룩진 땅, 동족인 유대인들에게서조차도 혼혈족이라고 멸시를 당하던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기 위해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게다.
로마의 압제에서 수탈과 압제를 당하던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려고 그들 틈바구니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텐트를 치고 함께 거하시기로 스스로 작정하신 게다.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세상, 분열과 다툼으로 만연한 인생의 현장에 평화의 왕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이 이 땅을 새롭게 바꿔놓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의 모습과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찾아오셨지만,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문을 거부하고 밀어냈지 않은가? 자신의 어둠이 드러날까 봐. 빛의 광채가 두려워서. 자신들의 어둠을 드러내기만 하면 희망은 있는데, 그게 어렵다. 가면을 벗고 겸비하여 회개하기만 하면 회복과 치유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불안하다.
어느 목사님이 쓴 글이다. 목사님이 부산의 한 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의 일이란다. 어느 날 목사님에게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교인 두 분이 시장바닥이 떠나가라고 싸움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 분은 장로였고, 다른 분은 갓 전입한 협동안수집사였다. 어떻게, 왜 싸웠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엄청나게 싸웠기에 담임목사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들린 것이다.
그 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밤늦게 당사자인 장로님께서 전화를 걸어왔다. 내용인즉 이랬다. "이미 목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러 저러해서 안수집사와 싸웠습니다. 제가 내일 예배 대표기도 순서자인데 장로로서 너무 부끄럽고 죄송해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순서를 다른 분과 교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목회 연륜이 있었더라면 장로님의 요청대로 순서를 바꿔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30대 초반의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원칙주의자였던 목사님은 장로님의 그 '핑계'를 수용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장로님을 설득했다.
"우리가 언제 의로워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까. 목사가 의로워서 설교하고 장로가 의로워서 기도 인도를 하겠습니까. 그저 우리는 죄 많은 인간인 채로 십자가만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긍휼과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요,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오십시오. 그리고 그냥 기도 인도하십시오."
연세 많은 장로님은 여러 번 하소연하다 할 수 없이 기도를 맡기로 하셨다. 주일 아침 예배시간을 앞두고 예배 준비실에서 초조하게 장로님을 기다렸다. 평소에는 예배 30분 전에 나오던 분이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예배를 딱 1분 앞두고 장로님은 오셨고, 기도 시간까지 고개를 떨군 채 예배를 드리셨다.
순서가 되어 기도를 인도하러 단상 앞에 나오셔서는 말문이 막혀 2-3분을 침묵한 채 가만히 계셨다. 그러다 장로님은 울음을 터뜨리시면서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며 대성통곡을 하셨다. 그날 목사님은 평생에 들었던 그 어떤 기도보다 은혜롭고도 감동적인, 그리고 진솔한 기도를 들었단다. 온 교인들이 함께 통곡하며 기도했다.
그 날 목사님은 비로소 예배란 '우리 자신을 죽여서 바치는' 제사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내 의지와 체면, 욕심을 몽땅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은혜만을 갈망하는 것임을 배운 순간이었다.
실수하지 않을 재간은 없다. 죄 짓지 않을 능력도 없다. 어리석은 길을 걷지 않을 완벽함을 가진 사람도 없다. 실수도 하고, 죄도 짓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에 아픔과 고통이 다가오고, 인생 파탄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요즘 여기저기서 신음과 탄식 소리가 들린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다. 한 가닥 희망의 빛줄기라도 보이면 용기라도 생길텐데, 절망의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어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느낌이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을 위로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을 찾아오셨다. 이 땅에 한 가닥 희망의 씨를 뿌리기 위해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셨다.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과 인생을 예수님에게로 돌이키는 것.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주인으로 오셨다. 예수님을 마음과 공동체의 왕좌에 모실 때 인생이 달라지고, 공동체가 바뀐다. 예수님께로 돌아가려면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운 줄 알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 거기에 희망의 꽃이 피어난다. 내 인생의 주인으로 찾아오신 예수님께 '나는 죄인이다'고 고백해서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는 성탄절이 되길 바란다.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