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직시한 한국 사회의 가장 고질적 병폐 가운데 하나가 여성 차별이었다. 유교적 관습에 기인한 남녀 차별 관습은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것으로 교회는 이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 여성들은 소위 ‘삼종지도(三從之道)’ 즉 여자는 일평생 세 남자에게 종속되는데,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출가한 후에는 남편에게, 그리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종속된다는 유교의 전형적 여성 차별의 악습이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아내를 내쫓는 일곱 가지 구실로 불순구고(不順舅姑:시부모에게 불순종함), 무자(無子), 음행, 질투, 악질(惡疾), 구설(口舌), 도절(盜竊) 등을 말한다. 장로교 공의회가 여성의 인권에 관하여 결의한 다섯 가지 항목을 보면, “첫째는 남, 녀가 쟝셩 하기 전에 혼인하는 일이오, 둘째는 과부가 두 번 시집 가랴는 거슬 금하는 거시오, 셋째는 교중 신도가 밋지 아니하는 이와 혼인하는 거시오, 넷째는 혼인을 매즐 때에 몬져 돈을 받는 거시오, 다슷재는 부녀를 압졔하는 일을 업시하자고 하는 일이라.”했다. 감리교회에서도 1895년 선교사연회에서 일부다처주의를 정죄하고 첩을 가진 자는 교인 자격이 없으므로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의하였다.
유교 전통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여성을 차별하는 가장 대표적인 악습은 양반들이나 벼슬아치들이 소실, 즉 첩을 두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일부일처제를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이 제도를 교회는 처음부터 엄격하게 금지했다. 소실을 정리하지 않은 자는 결코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데릴사위나 민며느리(씨받이) 제도도 금지했다.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첫째 조건을 여성 교육에 있다고 판단한 선교사들이 여성 교육 기관 설치에 치중하여, 감리교에서 먼저 이화학당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집안의 흥함과 나라의 부함과 백성의 강함이 젼국 녀인을 교육시키는데 달녀거늘…”이란 말에서 보듯 여인들의 교육에 교회와 국가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을 강조했다. 황해도 평산 감바위교회에서는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쓸 것과 한 자리에서 식사할 것을 결정”했다고 보고한다. 교회 안에서 부인에게 하대하거나 반말을 하는 것을 금하고 존댓말을 쓰게 하는 것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가 여아들을 교육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다음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셔울 연동 녀학당에 학도가 지금 이십 명인데 그 학교 규칙인즉 비단 학문만 가라쳐셔 발신하게 하는 거시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공부와 힘으로 하는 공부를 다 하는데 음식 만드는 일과, 바느질하는 일과, 국문과, 국문습자와, 셩경을 날마다 외오는 공부와 풍유하는 공부와, 산슐과, 디리와, 력사와, 한문과, 한문습자와, 화학과, 간혹 체죠운동하는 공부인대 … 디리와 력사도 잘 알거니와 산슐에 통분까지 알고 한문은 거의 이쳔 자 가량이나 아는 거슬보니 우리 예수교 회중뿐만 유익한 거시 아니라 우리 나라에 크게 유익한 긔초가 될 터히나 이거시 쥬 하나님 압헤 감샤한 거시라. 만일 엇더한 교우던지 딸을 학교에 너호랴 하면 일 년에 당 오백 양식 드려노흘것 갓흐면 학교에셔 먹이고 입혀 잘 교육 식혀 주나니 원하시는 이가 잇거든 셔울 련동 또틔 부인 앞으로 편지 하시압.”
한국에 첫 선교사로 왔던 언더우드는 한국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에서는 여성을 격리시키는 관습이 중국보다 더 엄하여, 실제에 있어서는 인도의 관습과 비슷하다.……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기독교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이 집에서 고된 일만 해서는 안 되고, 즐거움도 가져야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미 살펴 본 바 같이 네비어스 선교 정책에도 부녀자들과 소녀들에게 중점적으로 전도하라고 한 것도 여인들에게 선교의 초점을 맞추고 여인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한 선교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남녀 차별의 철폐는 하나님께서 일남일녀를 지으시고 부부가 되게 하셨으며, 서로 돕고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초 내한 선교사인 알렌 의사가 미국 본부에 보낸 첫 편지에서, “여자들은 아주 격리된 뒤쪽의 집에서 거주하는데 이곳은 마치 감옥과 같이 격리되어 있는 곳이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저녁 9시까지는 거리에 나올 수 없고 큰 종이 울리면 거리에는 남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된다.”고 기록해 여자들이 감옥과 같은 곳에서 구속되어 살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일찍이 만주에서 한국 성경을 번역, 출판한 존 로스(J.Ross) 선교사는 기독교만이 조선 여성을 해방 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바 있다. “기독교만이 조선에 있는 부녀자들을 정당한 사회적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그들에게 그 위치와 위신을 확보해 줄 수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즐겁고 덕스럽게 그 의무를 수행하고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그 누구나, 종족, 피부, 언어, 문화, 종교, 지역을 초월해 모두 동일한 존재요 어떤 차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남녀평등이란 명제 하에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여성 인권 회복과 성 차별의 철폐야말로 초기 한국 교회가 이루어 낸 값진 선교의 결과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