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일은 물론 복음 전파였다. 그런데 이 복음 전파는 단순히 개인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사회도 개혁하고 구원할 수 있는 효율적인 길이기도 했다. 1930년대에 고당 조만식(曺晩植) 장로는 “회개는 가치 있는 사회변화의 유일한 기초”라 확언한 바 있다. 그는 복음의 선포는 민족 부흥의 시작과 끝이라고 강조하면서 한 지역에 한 교회 운동을 지원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이 운동이 민족의 사회적 삶을 기독교화하는 과제에 원동력이 됨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복음 선포는 개인 구원뿐 아니라 민족의 사회적 구원의 틀이었다. 따라서 개인구원이 사회구원의 밑받침이 된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후진되고 뒤떨어진 한국 사회 개화에도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결과도 크게 나타났다. 오랫동안 중국 문물을 답습해 오던 조선은 서구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쇄국 정책 일변도로 나갔다. 그러나 밀려오는 외세에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문물과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교사상의 인습에 젖은 한국민들이 구각(舊殼)을 벗어 버린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대에서 언제까지나 옛 모습을 지니고 살 수만은 없었다. 이런 옛 인습을 벗어 버리게 하는 일을 교회가 앞장서 선도해 나갔다. 이 일에 대해 「매일신보」는 “예수교가 나라 문명 부강과 독립 자쥬의 근본이 되는 쥴을 깨달앗다.”고 보도했다. 내용을 옮겨 보자.
“지금 세계 각국에 문명 개화한 나라들은 다 구교(舊敎)나 야소교를 밋는 나라인직 이걸 보거드면 그리스도교가 문명 개화 하는 대는 긴요한 것이라. 크리스도교 하는 백셩은 언제든지 올코 공번되고 의리 잇는 일을 하거드면 하나님이 보아 주시는 것을 밋는 연고요.....우리가 오늘날 대한국을 대하야 축샤하노니.....정치가 더 잘되고 국가가 태평하기를 발아며 대한 신민들이 무론 빈부귀쳔하고 졈졈 나라 사랑하는 마음들이 생겨 자긔 목슘보다 국가 명예와 진보하는 것을 더 즁히 녁여 대한이 더 문명하며 법률과 긔강이 밝게 서로 협잡하고 나라 법률을 억이고 국민의게 해로운 일을 못하도록 되기를 축슈하노라.”
기독교 국가가 선진 개화됐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우리나라가 더 문명 개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개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의료와 교육의 개화였는데, 이 부분은 이미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그 외의 몇 가지 중요 사항만 다룬다.
첫째 YMCA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서 어떻게 사회 개혁에 이바지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 분야에 많은 공헌을 한 기독청년회 즉 YMCA의 창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원래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1844년 영국의 기독교 사업가 조지 윌리엄스(G.Williams)가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지(智), 덕(德), 체(體) 세 가지 덕목을 청소년들에게 함양시키기 위해 시작한 초교파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교단, 성별, 피부색깔, 종족의 차이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단합한 실천적 운동이다.
한국에서 Y운동이 시작된 계기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미국과 캐나다 YMCA에 한국에서 이 단체 시작을 위한 자금 요청을 한 데서 비롯됐다. 이 요청을 받은 그 곳 Y는 회원과 지도자들이 구체화될 때까지는 자금 지원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해 왔다. 이에 따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회원 모집에 나서 150여 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고 진척을 보였다. 그러나 이 일은 국왕 고종이 이 단체가 정치적 성격을 띨 것을 경계함으로써 중단되고 말았다.
1900년경 영국에 유학했던 여병현(呂炳鉉)이 귀국하면서 Y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언더우드는 세계 Y 총무 모트(John Mott)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모트는 상해에 있던 동양 순회 총무 나연(羅淵)을 서울에 파송해 현지 실정을 조사케 했다. 그 후 1901년에 뉴욕의 국제위원회가 질레트(Philip Gillette)를 한국 YMCA 설립 준비를 위해 파송했다. 질레트는 서울에서 배재학당과 한영서원 학생들과 더불어 사업을 시작하면서 Y 창립을 위해 노력했다. 1903년 10월, 정동 유니온클럽에서 선교사 게일(S. Gale)이 초안한 헌장을 낭독하고, 통과된 헌장에 28인이 서명 날인함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가 공식 조직됐다. 게일이 첫 회장으로, 윤치호가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후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총무에 취임했다.
YMCA는 국가의 개혁과 개화에 앞장섰던 독립협회가 수구당의 압박으로 해체된 후 사실상 이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만들어진 단체다. Y에서는 고관들 자제들이 사교와 친목,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빈한한 가정 소년들이 주, 야간으로 실시되는 기술학교에서 기술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산업부(産業部)에서 목공, 페인팅, 사진기술, 금속, 인쇄, 직조 등의 직업훈련을 받았다. Y에서는 체육교육과 여러 가지 운동 즉, 야구, 농구, 배구, 정구, 탁구, 정말(덴마크) 체조, 인도봉(印度棒:곤봉) 등 현대 스포츠을 소개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운동경기대회를 실시해, 국민보건과 운동 경기력 향상에 크게 공헌했다. 따라서 YM은 청소년들의 좋은 사교와 훈련장이 될 수 있었으며, 사회계몽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1907년 미국 기독교인 실업가 와나메이커(Z.Wanamaker)가 4만 달러의 거금을 희사했고, 현흥양(玄興洋)이 9백여 평 땅을 기증해 주어 현재 YMCA가 있는 종로 2가에 1천여 평에 현대식 3층 건물을 서양식으로 지어 신축했다. 이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고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이라 장안의 명물이 됐다. 1910년부터는 지방에도 지회를 설립해 활발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선교와 봉사, 교육에 치중했다.
Y는 기관지 「청년」(靑年)을 1914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했고, 1925년 9월 한국 Y는 세계 Y 연맹에 가입해 세계와 교류하면서 한국 청년들의 활동범위를 세계로 넓혀 주었다. 1927년부터는 농촌운동도 전개해 도시에서 뿐 아니라 농촌지역 계몽에도 다대한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