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로 이사를 온 후 새로운 것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Birds)들이다. 아침이 되면 우리 집 주위에는 많은 새들이 와서 여러 소리를 낸다. 그 이유는 옆집에서 새들이 언제고 와서 먹을 수 있는 새 먹이통을 하필이면 우리 집 담장 바로 옆에 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끄러운 새소리 중 다른 새들과 전혀 다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짹짹” 소리가 아니라 “깍....” 하는 한 번의 소리였다. 그 새는 소리를 두 번 연거푸 내는 일이 없었다. 한 번을 “꺅” 한 후에는 한참 있다가 그 소리를 다시 내곤 했다. 그 소리는 허스키한 소리였다. 어찌나 웃기기도 하고 듣기 싫기도 했는지 나 혼잣말로 “저건 뭐하는 놈이야!”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마도 부부싸움을 하고 나온 새 일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런데 내가 듣기에는 늘 한 마리였는데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보려고 하니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교회 새벽기도 후 파킹 장에 나오니 그 소리가 다시 들린다. 아마도 나를 따라 다니는가라는 생각이 났지만 그러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결국 그 새 종류를 알게 되었는데 까마귀 과의 새였다. 내가 들은 그 소리는 인생을 다 산 사람의 소리같이 들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루 이틀 지날수록 내가 그 새소리를 더 듣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듣기 싫었던 소리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소리 자체는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었지만 그 소리가 나에게 매력적인 소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상한 새도 지어놓으셨다. 전부 “짹짹” 소리를 내게 하지 않으시고 껄쭉한 허스키 소리를 가끔 한 번씩 내는 새를 만드셔서 나로 하여금 웃게 하시고 그 소리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교회를 생각해 본다. 교회는 같은 배경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나의 생각, 나의 배경, 취미도 다르며, 거의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다가 보니 함께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다름이 아름다움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서로 다름이 오히려 하나가 되게 하고 매력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약함을 채워주고, 섬기며, 더욱 세련되고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장 32절)라고 말씀하신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름으로 서로에게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될 때 사랑으로 멋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 마음으로 나와 다른 서로를 보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마음일 때에 교회는 하나님을 마음껏 드러내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곳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고생들이 많은가? 그 사람이 어떤 때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이야기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사람자체를 받아들이면 어떠한 상황도 문제가 없어진다. 오히려 다른 소리가 또 다른 행복을 만들어 내는 소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한 소리를 내며 살면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복음 안에 서로의 다름을 모두 덮어 놓으면 조금 다른 음정이라도 오히려 매력이 되고, 사랑의 이유가 되며, 아름다운 소리가 되리라 믿는다. 그 모습이 사랑의 모습이고 행복한 교회로의 한걸음일 것이다.
그 까마귀가 어제는 울지 않았다. 다른 집에도 가야했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도 웃음과 행복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나 혼자만의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