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으로 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욥의 고난은 악성 피부병에 걸려 그릇조각으로 몸을 긁는 육체의 고난입니다. 더 큰 고난은 자신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재산을 상실하는 고난일 것입니다. 더구나 개념 없는 친구들이 괴로움에 가득 찬 욥을 정죄하고 회개하라는 것도 적지 않은 고난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고난은 아마도 고난 중에 부르짖는데도 전혀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욥의 처절한 부르짖음에도 하나님이 냉혹하게 응답하지 않는 것은 정말 큰 괴로움일 것입니다. 욥은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잊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감옥 속에서 잊힌다는 것, 외로움 속에서 잊힌다는 것, 배고픔 속에서 잊힌다는 것, 죽어가면서 잊힌다는 것은 모두가 고통스런 일입니다. 잊힌다는 것은 무시당하는 것이요, 버려지는 것이요, 그리고 외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잊히기 싫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아우성치며, PR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요셉을 이집트 감옥 속에서 돌아보시고, 다윗을 광야에서 기억하시고, 예레미야를 우물 속에서 구해내시며, 빌립보 지하 감옥의 바울을 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돌이켜 보시고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권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특히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 남아있는 노아와 그 식구들 및 방주 안의 들짐승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창 8:11).
원어로 쓰인 “자카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기억한다”로 혹 이전 번역에서는 “권념한다”로 번역되었습니다. 권념(眷念)이라는 말은 요즈음은 잘 안 쓰는 단어지만, 뜻은 아주 은혜가 됩니다. 이는 “돌이켜 보아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노아와 가족 그리고 방주에 탄 모든 동물을 생각하고, 사랑을 베풀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자카르”의 하나님은 첫째, 우리를 사랑 속에서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비로운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정상을 참작하시고 돌이켜 우리에게 애정을 베풀어주십니다. 둘째,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즉시 바람을 일으켜 대홍수의 물이 물러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을 닫아주십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는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분이 어려움에서 우리를 회복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