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1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4)
나그네는 지금 살고 있는 여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여기는 잠시 머무는 곳이고, 가야 할 방향이 따로 존재한다. 그래서 나그네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지향점이다. 그것이 없으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의미 없는 방황지가 된다. 인생 나그네 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디를 지향하고 있느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의 소중함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예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이다. 열심히 사는 것은 분명 모두가 추구해야 할 미덕 중 하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는 더 우선적이다. 열심이 나쁜 일을 위한 것이라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열심히 일할수록 남에게 더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은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졌었다. 열심히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성령이 바울의 이를 막았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도대체 왜 성령이 바울의 말씀 전파를 막은 것일까? 그 답의 단서는 '아시아'에서 찾을 수 있다. 성령께서는 말씀이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니아'에서 전파되기를 원하셨다.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여 주신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복음의 서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점이었다.
나그네로서 삶의 우선순위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이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나라를 향한 순례자들이다. 순례자는 나그네의 길을 희망 안에서 기쁨으로 걷는 자들이다. 희망은 지루한 기다림도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바꾸어 주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희망의 감격 속에서 오늘의 고통을 상대화시키는 사람들이라고 평가된다.
나그네는 지금 여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순례자들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지금의 여기를 포기한 자들은 결코 아니다. 그것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오늘의 기회를 선용한다. 우리들에게 지금 여기는 하나님나라에 가져갈 상급을 준비하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하나님나라의 선한 청지기들이다.
청지기의 사전적 의미는 '주인의 일을 맡아 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이다. 창세기의 중심 인물인 요셉은 누구를 섬기든지 최선을 다하여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던 대표적인 청지기였다. 그는 형들의 안부를 알아 오라는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애굽으로 팔려갔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종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만큼 성실한 청지기였다. 그런 자세 때문에 요셉은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바로에게 발탁되어 총리가 된 후에도 요셉은 국정 관리를 지혜롭게 수행하였던 제국의 청지기였다. 그것을 통하여 요셉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큰 민족으로 성장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앙 안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순례자들이면서 동시에 지혜롭고 성실한 청지기들이다. 나그네로서의 두 모습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 잘 설명되어 있다. 마태복은 25장은 24장과 함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그 내용은 예수께서 마지막 재림하실 때에 일어날 여러 사회적인 변화와 현상들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으로, 그런 시대에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열 처녀 비유'는 신랑이 오기를 준비하고 기다려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반면에 '달란트 비유'는 신랑이 오기 전까지 이 땅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수행해야 할지를 강조한다. 전자가 순례자의 삶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청지기로서의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준다. 이 둘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 본질이다. 그런 점에서 종이 최선을 다하여 남긴 달란트는, 신랑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한 신부의 아름다운 선물이 될 수 있다.
나그네의 한 손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최선과 성실이, 다른 손에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등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안의 나그네가 지닌 아름다운 모습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