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폴 박사. ⓒ트위터
(Photo : ) ▲이안 폴 박사. ⓒ트위터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가 있다. 우리가 이를 잘 적용할 수 있을까?

영국의 신학자인 이안 폴(Ian Paul) 박사는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 게재한 글에서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말은 최신 유행어가 되고 있다. 특히 열정을 가진 진보적 동아리들이 이를 거부하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안 폴 박사는 "최근 온라인 토론에서 나는 이 문구가 성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한 사람이 '이 문구가 사람들을 해치고 큰 손해를 끼치고 있으며, 사랑하는 명령을 은밀하게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고 언급했다.

폴 박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한 가지,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불일치과 다양성, 분쟁과 불화의 문화 속에서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소외된 자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방식이다. 그분은 깨끗하지 않은 자를 치유하기 위해 손을 대심으로써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뒤짚어 없으셨고, 불의한 이들과 함께하심으로써 정죄를 받으셨다. 그분은 다른 이들에게 정죄받던 죄인들 편에 서셨으며, 용서를 보여 주셨다. 그분의 사역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던 자들이 아닌, 영적으로 병들고 아프며 회개가 필요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눅 5:32). 무엇보다 참으로 죄인들을 사랑하셨다"고 전했다.

이어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죄를 싫어하셨는가? 마가복음 초반에 보면, 그의 첫 번째 독자들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님은 문둥병으로 고통받는 한 남자를 만나셨다. 그리고 분명히 영향을 받으셨다. 대부분의 성경에는 '민망히 여기셨다'(막1:41)고 표현돼 있다. 그러나 원문은 '화가 나셨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이는 매우 도전적이다. 신약은 모든 죄적인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혹은 '진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다는 표현은 절대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이 남성의 병에 대해 화를 내신다. 그분은 타락한 세계에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한 것에 대해 화가 나신 것일까? 아니면 이 남성을 소외시킨 종교적 문화에 때문에, 혹은 이 남성이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의심해서 화가 나신 것일까? 마가는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지 않다. 그는 그러나 죄적인 태도와 행동 때문에 예수께서 큰 고난을 당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폴 박사는 "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이들에게 짜증을 내셨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만나셨을 때에도, 반대자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분노하셨다(막3:2). 제자들이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금했을 때에도 화를 내셨다(막 10:14).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을 보다 온화하게 묘사하기 위해 말을 순화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같은 사역적인 면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마태복음 12장(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안주와 이기심, 자기 만족 등을 찢으셨다. 그분은 말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나누지 않고, 자신의 복을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제한한 태도에 진심으로 화가 나신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이 점을 매우 강하게 붙들었다. 그는 완벽한 심판 목록인 예수님의 7가지 '화'를 기록했다"면서 "이는 마치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셨고, 죄가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와 일그러진 삶의 모든 결과를 미워하셨다"고 했다.

폴 박사는 우리가 이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만 미워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말이 과하지 않다. 내가 만약 하나님께서만 완벽하게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해 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면, 제자로서 포장이 잘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를 우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묵상하는 데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지난 27년 동안 많은 이들을 슬프게 했던 힐스버러 참사에 대한 최근 판결에서 보듯이, 진리를 왜곡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변호하는 데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분함을 느끼지 않는가? 우리 서양인들 가운데 일부가 구입하는 사치품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 착취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부당함을 느끼지 않는가?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것과 환경 파괴, 특히 어린 소녀들을 비롯한 청년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 착취하고 조종하는 문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많은 이들을 외롭게하고 소외시키는 우리 사회에 고질적인 자기중심적 문화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리 주변의 죄에 관하여 예수님의 분노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제자로서 실패한 것이고 인간성을 잃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바울 사도가 로마서 12장 9절에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것과 매우 비슷한 윤리적 가르침을 기록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바울 사도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다. 사실 그는 이것이 다른 이들을 향해 신실한 사랑을 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구호는 보다 현대적이라 할지라도, 생각의 뿌리는 신약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또한 위대한 신학자인 어거스틴 히포 역시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수 있다. 나의 정체성과 행동을 정말로 구별할 수 있을까? 나의 행동을 싫어하거나 깊이 반대하는 이들이 정말로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태도나 실패가 얼마나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하게 되는지, 이를 나에게서 분리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청년들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죄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서 다음 구절들을 소개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2, 4)

마지막으로 폴 박사는 "우리의 경험이 신학이 되기 전에, 이 같은 신학적 진리로 빚어질 필요가 있다. 구원받은 죄인으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 안에서, 당신이 미워하시는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궁극적인 값을 지불할 준비를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만 충분하다면, 우리에게도 당연히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